중국
특별한 이야기

최초의 건국 신화인 고조선의 단군 신화

한자 最初의 建國 神話인 古朝鮮의 檀君 神話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고조선
상세정보
평안북도 영변
평안남도 평양
황해도 문화현
백두산
인천시 강화군
개설

고조선 건국 신화는 13세기 후반에 저술된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비로소 역사적인 서술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자료들은 『위서(魏書)』·『고기(古記)』·『본기(本紀)』 등을 인용하여 서술하고 있고, 『단군기(壇君記)』·『단군본기(檀君本紀)』·『단군고기(檀君古記)』 등의 자료 이름도 확인되고 있어 『삼국유사』·『제왕운기』의 출현 이전부터 전해져 왔음이 분명하다. 특히 『삼국유사』고조선[왕검 조선]의 도입부에서는 『위서』를 인용하여 신화적인 내용을 배제하고 간략하지만 철저하게 고조선의 역사적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다.

고조선 건국 신화의 유형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여러 자료에 전하는 고조선의 건국 신화는 단군의 출생 모티브를 중심으로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고기』 유형이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이 유형은 가장 오래된 자료로 여겨지며, 널리 유포된 전승이기도 하다. 그 대략은 제석(帝釋)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태백산(太伯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고 인간 세상을 다스리던 중,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를 빌어 금기할 것을 권했으나 곰만 이를 지켜 여자의 몸을 얻어 환웅과 혼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을 낳으니 그가 요임금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조선을 개국했다는 것이다. 후에 단군은 백악산 아사달(白岳山阿斯達)로 이도(移都)하였는데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며, 기자(箕子)가 조선에 오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 1,908세였다고 한다. 이 전승은 곰·호랑이 등 수조(獸祖) 숭배의 요소를 보이고 있으면서도, 조(祖)[환인]→부(父)[환웅]→자(子)[단군]로 이어지는 부계 중심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두 번째는 『제왕운기』에서 전하는 『본기』 유형인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상제(上帝) 환인의 명을 받고 지상으로 내려온 단웅(檀雄)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다가 손녀(孫女)에게 약을 먹고 사람의 몸이 되게 하여 단수신(檀樹神)과 혼인시켜 단군(檀君)을 낳았는데, 조선의 강역을 차지하여 왕이 되었고 1,03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산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전승이다. 이에 신라·고구려·남북 옥저·동북 부여·예·맥이 모두 단군의 후손(檀君之壽)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전승은 수목 숭배 신앙을 배경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구조는 외증조[상제 환인]→외조[단웅]→부[미상]→손녀→단군으로 이어지는 비부계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고려 건국 설화와 같은 구조로, 고려 시대의 친족 관계에 대한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는 『응제시(應製詩)』 유형이다. 이것은 1396년 권근(權近)이 명(明)나라에 가서 고황제(高皇帝)에게 지어 바친 「응제시」를 통해 고조선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가운데 처음 소개된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온 신인(神人)을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여 왕을 삼았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그때는 요임금의 원년인 무진년(戊辰年)이다.

여기에서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이라는 역사적인 사실만으로 전승을 재구성하여 신화를 유교적인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의도를 볼 수 있다. 이 전승을 싣고 있는 대부분의 자료들은 『고기』 유형의 전승을 보충하는 의미로 부기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가장 널리 이해되었던 전승이다.

네 번째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유형이다. 그 대략은 이러하다. 하늘신[天神] 환인(桓因)의 명을 받고 신단수 아래로 내려온 웅(雄)은 신시를 열고 인간 세상의 일을 주관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가 신(神)에게 사람 되기를 원하자 신은 신령한 풀을 곰에게 먹게 하여 여자가 되게 하였고, 환인은 잠시 변하여 여자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는데, 그가 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이다. 이 전승에서는 또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과 혼인하여 부루(夫婁)를 낳았는데, 중국우임금이 도산(塗山)에서 조회할 때 단군은 부루를 보내 참여하였고, 후에 부루는 북부여왕(北扶餘王)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전승에서는 환인과 웅녀의 결합으로 단군이 태어났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환웅[단웅]은 단지 환인이 지상으로 내려와 단군을 낳기 전까지의 기반을 닦는 역할에만 그치고, 이외의 역할이 전혀 부여되지 않은 존재로 남아 있다. 이 유형은 그다지 오랜 전승이라고 생각되지는 않고, 『응제시』 유형과 함께 조선 시대의 유교적인 사고를 기준으로 전승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섯 번째는 『제대조기(第代朝記)』 유형이다. 이 전승은 승려인 추붕(秋鵬)이 18세기 초에 편찬한 『묘향산지(妙香山誌)』에서 『제대조기』라는 자료를 인용하여 전한 이야기이다. 『제대조기』는 어떤 성격의 자료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온 환인(桓仁)의 아들인 환웅(桓熊)이 백호(白虎)와의 관계에서 단군을 낳으니, 우리 동방에서 나라를 세운 군장(君長)으로 그때는 요임금과 같은 해이다.

이 전승에서 환인의 명칭이‘환인(桓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도 다른 유형과 구별되는 점이지만, 단군의 출생이 환웅(桓雄) 혹은 단웅(檀雄)이 아닌 환웅(桓熊)과 백호가 결합한 결과였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여기에는 『고기』 유형에서 사라졌던 호랑이가 재등장하고 있다. 이 전승을 채록한 추붕이 ‘사람들이 애착하거나 따르지 않는 색다른 설명’이라고 말하고 있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널리 알려졌던 전승은 아니다.

이밖에 환웅이 곰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고, 여우와 혼인하여 기자(箕子)를 낳았다는 전승도 전한다. 이런 사실들은 고조선 건국 신화인 단군 신화가 후대에 전래되면서 당대의 정치·사회·문화적인 많은 요소들과 결합되어 그 내용들이 지속적으로 추가되거나 탈락되며 변화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정치 신화로서 단군 신화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자, 그 전승의 유형을 파악하는 것이 단순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시대에 전승된 주류는 『고기』와 『본기』 유형에, 조선 시대의 그것은 『응제시』 유형에 있었다.

고조선 건국 신화의 지역별 전승 양상

단군 전승이 전해지던 곳은 묘향산(妙香山)·평양(平壤)·구월산(九月山)·강화(江華) 등 서북한(西北韓) 지역이다. 묘향산은 단군이 출생한 곳으로 전승의 출발지라고 할 수 있고, 평양은 단군의 초기 도읍지로 알려져 있다. 구월산은 단군이 도읍을 옮긴 곳일 뿐만 아니라 산신(山神)으로 자리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강화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단군 전승의 최남단이다. 이들 지역에서 단군은 지역신(地域神)으로 숭배되며, 공동체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기능하였다.

묘향산에서의 단군 전승은 환웅과 웅녀 등이 철저하게 배제되고 단군을 중심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승의 내용이 이렇게 재편된 때는 대략 『응제시』 유형의 전승이 형성되던 때와 같은 시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환웅의 강림지(降臨地)로 여겨지던 단군대(檀君臺)와 단군의 탄생지로 여겨지던 단군굴(檀君窟) 등에서의 전승은 단군이 강림한 장소 혹은 치국지(治國地)·초거지(初居地) 등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묘향산에서는 이미 환웅 혹은 단군을 산령(山靈)으로 하는 전승이 전해지고 있었고, 고려 시대부터 불교의 성지로 이해되어 단군을 모신 단군암(檀君菴)이나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삼성암(三聖菴) 등을 비롯하여 약 360여 개에 달하는 사찰이 조선 후기까지 전해지던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전승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불교와 융합되어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불교에 윤색된 형태로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 신화는 묘향산의 이런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양에서의 단군 전승은 고구려를 비롯한 제반 전승과 섞여서 전하고 있다. 이것은 고조선의 영역과 주민의 대부분을 계승한 고구려의 신앙체계에 그 전승이 융합된 데 원인이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이적(夷狄)의 군장 명칭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는 가한(可汗)은 단군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며, 『고려사』에 보이는 서경신(西京神)·평양신(平壤神)은 지역신으로서 단군을 의미하는 것이다. 평양묘(平壤廟)에서 단군은 지역신으로 기능하면서 기복(祈福)을 위해 숭배되었고, 이민족에 대한 병첩(兵捷)·국왕의 장도에 대한 기원·기우 등을 위해 모셔졌다. 또 묘청(妙淸)이 봉안한 팔성(八聖) 중 하나인 구려 평양 선인(駒驪平壤仙人)은 단군 전승이 산신 신앙과도 융합되어 전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평양묘에 모셔진 신격(神格)의 명칭은 신(神)→묘(廟)→군(君)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그 명칭이 평양군(平壤君)으로 정리되는 시점이 『삼국유사』·『제왕운기』가 편찬되었던 고려 후기와 일치하는 데서 고려 전기 신적(神的) 존재로서 이해하였던 것이 후기에 와서 역사적 존재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구월산에는 많은 단군 유적과 전승이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도 환인[혹은 檀因]·단웅(檀雄)·단군을 모신 삼성사(三聖祠)는 전승의 중심지였다. 조선 전기의 사정을 전하는 『삼성당 사적(三聖堂事跡)』과 『관서승람(關西勝覽)』에 의하면, 삼성사는 구월산의 대표적인 사찰인 패엽사(貝葉寺)가 건립되기 이전인 신라 말 이미 대증산(大甑山)에 건립되어 있었으나 사세(寺勢)의 확장으로 두 차례의 이건(移建)을 거쳐 1006년(목종 9) 이전에 소증산(小甑山)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삼성사에 대한 지역민의 숭배 정도와 이곳에서의 전승이 불교와 융합·갈등 관계를 지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삼성사의 기능 중 기우(祈雨)·기청(祈晴)은 단연 우세하였고, 비정기적이지만 10세기부터는 국가의 기우처로도 이용되었다. 그 밖에 전염병의 퇴치·압병(壓兵) 등의 기능도 수행하였으며, 그 전승은 산신 신앙으로 대표되는 토착 신앙은 물론 선가(仙家)와도 융합되어 전해졌다.

고조선의 이도지(移都地)인 백악산 아사달(白岳山阿斯達)의 위치로 『삼국유사』에서 일연(一然)이 이해하고 있던 배천[白州]의 백악(白岳)·개성(開城)의 백악궁(白岳宮) 등은 고려 시대 개경(開京)의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과 관련한 의종(毅宗)의 백악 신궁(新宮) 창건 및 명종(明宗)의 좌소(左蘇) 백악산에서의 이궁[離宮, 별궁] 창건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의종 때의 이궁 창건은 고려 최대의 길지(吉地)였던 서경(西京)이 묘청(妙清)의 서경천도론 실패 이후 반역향(叛逆鄕)으로 변모하게 됨에 따라 그 대응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일연의 백악산 아사달에 대한 이해에는 일정 부분 도참(圖讖)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었다.

강화의 단군 유적과 전승은 단군이 직접 제천(祭天)했다는 참성단(塹城壇)과 그가 세 아들에게 쌓게 했다는 삼랑성(三郞城)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시기적으로는 고려고종 말·원종 초에, 목적면에서는 국조(國祚)의 연기(延基)와 비보(裨補)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이전부터 민간에서 지역민에게 기우(祈雨)·압병(壓兵) 등을 위해 숭배되었던 전승이 조정에 의해 주목되었던 시기가 바로 그 때였으며, 그 목적도 공동체의 안녕에서 국가적인 것으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 치제(致祭)를 위해 제전(祭田)을 두는 한편, 재궁(齋宮)을 설치하고 봄과 가을에 행향사(行香使)를 파견하여 초례(醮禮)를 지내기도 하였다. 특히 원종 때 참성단에서의 초례 설행 배경을 '삼한이 변하여 진단이 된다'는‘삼한변위진단(三韓變爲震旦)’에서 찾고 있는 백승현(白勝賢)의 주청은 주목된다. 그의 주청은 고려 건국의 역사적 명분이었던‘일통삼한(一統三韓)’이라는 역사 인식의 한계로 각 지역에서 일어났던 삼국 부흥 운동 등의 분립적인 요소를 해소하기 위한 역사 변전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또 그 논의가 있은 지 20여 년 후 고조선을 고려 역사의 출발로 설정하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간행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고조선 건국 신화의 역사적 정립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의 단군 전승이 부계 중심의 3대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비해, 『제왕운기』에 인용된 『본기』의 전승은 비부계 중심의 5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본기』 유형의 전승은 고려 전기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전해 오다가 이승휴(李承休)에 의해 비로소 주목되었다. 『본기』는 비록 7대에 걸친 설화로 전하고 있지만, 역시 비부계적인 계보를 가지며 고려태조왕건의 가계를 정리한 『고려 세계(高麗世系)』와 비교할 수 있다. 특히 각 전승에서 그 내용을 비부계적인 것으로 결정하는 요소인 『본기』의 단웅천왕(檀雄天王)의 손녀와 단수신(檀樹神)은 『고려 세계』의 진의(辰義)와 ‘당 숙종(唐肅宗)’에 비교되는데, 이런 비부계적인 전승은 양측적(兩側的) 친속(親屬)이라는 고려 시대의 친족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

『본기』 유형의 가장 핵심적인 것은 단수신, 즉 나무신의 아들[목자(木子)]인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자겸(李資謙)과 이의민(李義旼)이 반란을 일으키며 명분으로 삼았던 ‘십팔자지참(十八子之讖)’은 『본기』 유형의 단군 전승이 이미 고려 전·중기부터 도참과 관련하여 전해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십팔자지참’이 고려 전기부터 전해오던‘용손십이진설(龍孫十二盡說)’ 및 개경(開京)의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 등과 연계되어 기능하고 있음을 볼 때, 그 형성 시기는 고려 초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음양 오행과 관련하여 ‘목(木)’에 대한 부정적인 해석을 한 권경중(權敬中)의 인식과 『본기』 유형의 전승이 반란 세력에 적극 이용되고 있음은 이 전승이 유포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 전·중기의 단군 전승과 관련하여 검토할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는 묘청이 서경팔성당(八聖堂)에 모셨다는 팔성(八聖)과 관련해서이다. 묘청은 개경의 지기쇠왕설과 관련한 이제까지의 소극적인 비보책(裨補策)과는 달리 이자겸의 반란 직후 도읍 자체를 서경으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서북 지역의 대표적인 신격(神格) 8위(位)를 팔성당에 모셨다. 이중 첫째 호국 백두악 태백 선인(護國白頭嶽太白仙人)과 넷째 구려 평양 선인(駒麗平壤仙人), 일곱째 증성악 신인(甑城嶽神人), 여덟째 두악 천녀(頭嶽天女)는 단군 전승과 관련한 신격으로 추측된다. 도참과 연계되어 전해지던 단군 전승의 편린들은 왕실의 이궁 경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점은 이궁 경영이 개경의 지기쇠왕설과 관련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1096년(숙종 1)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金謂磾)가 남경(南京) 건치(建置)를 주장하면서 인용하고 있는 도참 관련자료 가운데 고조선 때 인물로 이해되고 있던 신지(神誌)와 관련한 『신지비사(神誌秘詞)』가 언급되고 있는 것과 1234년(고종 21) 남경가궐(南京假闕)의 창궐을 청하고 있는 도참승(圖讖僧)이 좌소(左蘇)를 고조선의 도읍인 아사달(阿思達)로 비정하고 있음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원 간섭 초기 사류층(士類層)은 자신들이 속해 있던 당대를 이전의 사회와는 달리 이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구법(舊法)·고제(古制)에 토대를 둔 개혁정치의 실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역사 인식의 변화와 상고사의 재이해 등은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고려의 중흥을 위한 기대감의 표출이기도 하였다. 특히 일연과 이승휴의 다원적(多元的) 천하관에 기초한 상고사 범위의 확대는 더 이상 단군과 관련한 전승이 괴력난신(怪力亂神)이나 신이사관(神異史觀)으로 폄하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같은 시기에 편찬되었고, 이승휴가 일연의 명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자료는 다른 단군 전승을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고기』를 토대로 고조선의 역사를 이해했던 일연은 『고기』를 전적으로 믿는 입장에서 그가 『고기』와 달리 생각하는 부분은 주석 형식으로 그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에 비해 『제왕운기』에서 이승휴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그는 주석 형식으로 『본기』[『단군본기』]를 인용하여 5대 계보의 전승을 싣고 있지만, 그 자신은 『본기』 유형의 전승을 수용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그가 원시(原詩)에서 『고기』 유형과 같은 3대 계보의 전승을 이해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고려 후기 역사 인식의 변전과 함께 이루어진 상고사의 새로운 인식은 성리학을 수용한 사대부 계층에게 계승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도하던 개혁의 동기까지도 여기에서 구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은 백문보(白文寶)에게서 볼 수 있다. 특히 그가 주기설(周期說)을 근거로 제시한 단군 역년(檀君歷年) 3,600년은 고종 때 좌소(左蘇) 아사달(阿思達)로 비정되는 양주(楊州) 땅에 궁궐을 창건하고 이어(移御)하면 국조(國祚)가 800년 연장될 것이라는 도참승(圖讖僧)의 주장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이전부터 도참과 관련해서 전해오던 대주원(大周元)으로서의 단군역년 3,600년이 성리학을 수용한 사대부 계층에게 수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이색(李穡)은 단군에서 출발하는 상고사의 인식을 문화적 자긍 의식으로 확대시켰다.‘기자불신설(箕子不臣說)’이 그것인데, 그의 이 같은 인식은 반원(反元)의 움직임을 보이던 공민왕의 개혁 정치와도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백문보·이색으로 대표되는 신진사대부의 단군 인식은 1369년(공민왕 18) 동녕부(東寧府) 정벌을 위한 방문(榜文)에서 볼 수 있듯이 국조인식(國祖認識)으로 정립되었다.

이런 사대부 계층의 단군 인식은 『고기』 유형보다는 『본기』 유형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백문보·이색·변안렬 등이 이해하고 있는 단군의 표현에서 『고기』의 것이 배제되고 『본기』의 전승이 수용되고 있음에서 짐작할 수 있다. 또 조선 건국의 명분으로‘십팔자지참’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목자득국(木子得國)’의 참설이 이용되고 있음과 이후 단군을 국조(國祖)로 내세운 조선에서 『본기』 유형을 중심으로 전승이 재편되고 있음은 그런 사실을 말해준다.

고조선의 역년(歷年)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어국(御國) 1,500년, 수(壽) 1,908세, 『제왕운기』에서는 1,038년 등으로 나타난다. 최후에 대해서도 산신이 되었다는 이해가 일반적이지만, 역사적 존재로서의 사실에 입각하여 죽음을 상정하고 단군묘(檀君墓)의 전승도 전해졌고, 이는 대한 제국 때 단군릉(檀君陵)으로 숭봉되었다. 그 계보는 모두 제석·상제·천신 등 하늘과 연결되어 있어 우리나라 여러 건국 신화들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 연대에 대해서도 여러 기록이 전해졌지만, 조선 전기의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부터는 요임금 즉위 갑진년(甲辰年) 설에 따라 단군 즉위년을 요 즉위 25년 무진년(戊辰年)으로 파악하여 3725년이 제시되었다. 이후 이것은 통설로 자리하여 단군기원 BC 2333년의 근거가 된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단군 조선·기자 조선·위만 조선의 삼조선 역사 인식 체계가 확립됨으로써 보다 굳건해졌다. 평양에 단군사(檀君祠)를 세우고 국가 제사에서 단군을 모시는 한편, 삼성사·참성단에 대한 제사 역시 이루어졌다.

또 조선 후기에는 고조선의 중심지로 요동(遼東)이 주목되어 요동과 만주·한반도에 이르는 고조선의 강역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졌다. 허목(許穆)은 환웅의 신시(神市)에 인격성을 부여하여 단군에 앞선 상고사로서 신시씨(神市氏)를 상정하였고, 이익(李瀷)은 단군을 단국(檀國)의 왕명으로 파악하였다. 또 안정복(安鼎福)은 단군의 출생지로 알려진 태백산(太伯山) 역시 묘향산으로 파악하던 전통적인 이해를 확장하여 발해의 출발지인 태백산과 연계함으로서 백두산으로 비정하였다. 이런 이해들은 고조선 시조로서 단군의 역사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었고, 그런 움직임은 유희령(柳希齡)의 『표제음주동국사략』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 전기 일부 역사서에서 단군의 통치 사실을 연대기적인 측면에서 서술하려는 경향에서 비롯하였다.

단군 숭배 전통의 확산과 양면(兩面)

단군 숭배의 전통은 조선 후기 선가(仙家) 계통에서의 맥락에서도 이어졌다. 고려 전기부터 도참과 관련하여 전승이 전해졌던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운학선생사적(雲鶴先生事蹟)』·『오계일지집(悟溪日誌集)』·『해동이적(海東異蹟)』·『해동이적보(海東異蹟補)』 등에서 우리나라 선가·선도(仙道)가 단군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신앙 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홍경래의 난 때 단군이 명분으로 등장하고 있고, 19세기말 영해·문경 등에서 민란 주동자였던 이필제(李弼濟)가 단군의 화신이었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김염백(金廉伯)은 단군을 모시는 신앙 운동을 전개했으며, 20세기 초 백두산을 중심으로 백봉(白峰) 등이 전개한 신앙 운동은 1909년 대종교의 출현을 가져왔다. 또 『무당내력(巫黨來歷)』·『무당성주기도도(巫黨城主祈禱圖)』 등에서 확인되듯이 무속에서도 그 원류를 단군에서 찾고 있기도 하다.

제국 열강의 침입이라는 위기의식 속에 1905년부터 단군 기원을 뜻하는 단기(檀紀)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단군 인식의 새로운 국면이다. 단군은 한민족의 시조이고, 한민족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는 혈연 인식으로 확산되었다. 사실 대종교(大倧敎)에서의 단군 숭배는 일제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선 독립운동으로 이루어졌으며, 이후 민족주의 운동으로 확대되어 『단조사고(檀祖事攷)』·『신단실기(神檀實記)』 등 단군에서 이어지는 우리 역사를 정리하였다. 하지만 대종교와 분리된 단군교(檀君敎)가 조선 총독부의 일제 식민 통치 종교 정책에 부응하였고, 단군릉이 있던 평안도 강동(江東)의 유림을 중심으로 단군릉 수축 운동(檀君陵修築運動)이 있었다. 이런 가운데 47대 단군의 통치 사실을 정리한 『규원사화(揆園史話)』 등이 저술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제왕운기(帝王韻記)』
  • 『동사강목(東史綱目)』
  • 최남선, 『육당최남선 전집(六堂崔南善全集)』(고려 대학교 아세아 문제 연구소,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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