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성곽과 방어 체계는 어떠하였을까

한자 高句麗의 城郭과 防禦 體系는 어떠하였을까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개설

고구려는 국호 자체가 성을 의미하는 ‘구룬’ 혹은 '구루'에서 나왔다는 견해가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을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했고, 지방통치조직을 구성했으며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했다. 『구당서(舊唐書)』 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176개의 성이 있다고 나오는데, 이는 전국 지방행정단위의 성만 거론한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고구려성은 만주 지역과 한반도 지역에서 숫자는 크고 작은 것을 합해서 200여 기를 훨씬 상회하는 숫자로 확인되었다. 고구려는 4세기 이후 주요 교통로와 전략요충지, 지역 중심지에 조성된 크고 작은 성들을 연계하여 영역을 통치했고, 도성과 국경을 수비하는 입체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성 중심 방어체계는 수·당이라는 거대제국의 누차에 걸친 침략을 장기간 막아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성의 위치

수 양제의 고구려 침략시 참전했던 정천숙(鄭天璹)은 644년 고구려를 치려고 나선 당 태종에게 고구려는 성을 잘 지키기 때문에 쉽게 항복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647년 당 조정에서 고구려 침공 방안을 논의할 때에도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만들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처럼 고구려는 높고 험준한 산에 산성을 쌓고 주변에 있는 여러 성들을 서로 연계하여 입체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했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전쟁시에는 들을 비우고 일반민들까지 모두 산성으로 들어가 원정 온 침략군의 양식이 소진되고 지칠 때까지 장기간 농성(籠城)을 하다가 적이 퇴각할 때 공격해서 승리하는 청야수성(淸野守城) 전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고구려의 성은 지방통치를 위한 행정·문화·종교의 중심 거점이자 치소였고 군사기지로 국가체제의 근간이자 생존의 필수시설이었다.

고구려에서는 어떤 지역에 비중을 두면서 성들을 구축하였을까? 건국 초기에는 주로 수도권을 방어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으므로 혼강(渾江) 유역과 압록강(鴨綠江) 중류의 주변 지역, 그리고 수도권을 둘러싼 산악 지방에 성을 쌓았다. 그리고 영토를 확장해 가면서 성 또한 넓은 범위에 구축하였다.

교통 요충지, 생산지, 전술적으로 효율적인 곳을 택하여 축성했다. 주력 전선이 서북 지방이었으므로 고구려 중기 이후의 산성들은 요령성(遼寧省)의 태자하(太子河)·혼하(渾河)·소자하(蘇子河) 등 요하(遼河)를 따라 축조된 것이 많았다. 6대 태조왕(太祖王)은 요서 지방에 무려 10개의 성을 쌓았다. 이는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행정 단위의 성을 쌓은 것이다.

요동 반도에는 대련(大連)의 비사성(卑沙城)을 비롯하여 와방점(瓦房店)의 득리사(得利寺)[용담(龍潭)] 산성, 보란점(普蘭店)의 오고성(吳姑城), 장하(莊河)의 석성(石城) 등 전략적인 큰 성들이 있다. 압록강 하구를 중심으로 지류인 애하(靉河)와 혼강[압록강 지류] 유역에 성을 쌓았다. 서안평성(西安平城)·대행성(大行城)·박작성(泊汋城) 등의 강변 방어 체제를 구축했고, 내륙에는 대성인 오골성(烏骨城)을 쌓았다.

또한 평안도와 황해도에 이르는 해안 지역에도 육로와 해로의 전략적인 거점에는 반드시 성을 쌓았다. 길림성(吉林城)은 국내성(國內城)이 있었던 집안(集安) 일대[혼강과 신개하(新開河) 일대]와 두만강 하류에 집중되어 있다.

한반도에서는 서해안 일대와 동해안 일대 한강 이남의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북한의 고구려 산성은 41개의 성[산성은 33개]이 확인되었다. 그 외 중부 지방[경기·강원·충청]에 다수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한강에는 몽촌 토성(夢村土城), 아차산(阿且山) 보루(堡壘), 구의동(九宜洞) 보루 등과 하구에는 강화도와 김포 반도의 곳곳에도 성들을 쌓았다.

특히 임진강변의 호로고루(瓠蘆古壘), 한탄강변의 당포성(唐浦城), 아미성(阿未城) 등처럼 비록 소규모이지만 육군과 수군이 공동 작전을 벌일 수 있는 독특한 보루들을 구축했다. 충청도 내륙 및 금강 유역에도 고구려 산성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 동몽골 쪽과 대흥안령(大興安嶺) 산맥, 외몽골에도 고구려 산성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요동 반도를 비롯하여 고구려 영토의 바다나 섬, 큰 강의 하구에는 해양 방어 체제나 강변 방어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 외에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 전술적인 산성들이 있다.

성의 기능

고구려에서 성은 군사 공간, 정치 공간, 생활 공간, 경제 공간, 문화 공간의 기능을 골고루 담당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는 고구려가 60여 개의 성에 주와 현을 두어 정치를 했다고 기록하였다. 성이 정치 단위이며 도시임을 보여준다. 국내성(國內城), 평양성(平壤城) 등은 수도이므로 정치적인 기능을 주로 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북방 유목 민족 및 중국 한족과 항상 군사적인 충돌을 하였으므로 군사적 기능을 가진 성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고구려 성은 평상시에는 성주와 군인들, 일부 백성들이 거주하면서 행정 공간, 문화 공간의 기능, 즉 도시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는 유사시에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성 안으로 대피하여 전면전을 폈다. 고구려 성은 방어하는 공간일 뿐 아니라 전진을 위한 거점이었다.

압록강 하구의 오골성(烏骨城)[현재 봉황성]은 둘레가 산으로 15㎞에 달하지만 내부는 평탄해서 1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다. 북한 학자들은 이 성이 북평양이었고, 부수도 가운데 하나였다고 주장한다. 요동성(遼東城)은 현재 요양시에 있는 평지성이다. 제1차 방어선인 요하 전선을 담당하는 군사성이면서 부수도에 해당하는 행정 도시였다.

또 하나는 물류의 거점과 자원 확보지로서 경제 공간의 기능을 했다. 국경 근처의 성에서는 외국이나 다른 지역민들과 물자 교류를 하였다. 국내성이나 안시성(安市城)에서는 무기와 고대 화폐가 발견된다. 요동성은 유목 종족과 중국 세력의 공격을 방어하는 목적과 함께 요동 지배를 확고하게 하고, 서북쪽으로 진출하는 거점 기지였으며, 철 등 지하자원을 관리하고 무역을 하는 경제적 거점이었다. 고구려 성은 종교 공간이기도 했다.

중국의 『북사(北史)』에 따르면 성 안에는 고등신(高登神)과 부여신(扶餘神)을 모신 사당인 신묘(神廟)가 있었다. 고등신은 추모[고주몽(高朱蒙)을 가리킴]이고, 부여신은 그의 어머니인 유화 부인(柳花夫人)이다. 『당서』에는 요동성에 ‘주몽사’가 있어서 공방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위급해지면 사람들이 그곳에 달려가서 빌었다는 내용이 있다. 심지어는 여인을 아름답게 치장해서 사당에 들여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성의 종류와 형태

고구려 성은 역할과 기능에 따라 궁성·도성·산성·평지성·장성·차단성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고구려의 수도는 평지성과 산성의 조합으로 도성체계를 구축했다고 보는 설이 있다. 하지만 첫 번째 도성이었던 중국 요령성(遼寧省) 환인(桓仁)과 세 번째 도성인 평양의 경우, 산성인 오녀 산성, 대성산성과 짝하는 평지성의 존재가 명확하지 않아 평지성과 산성의 조합설을 부정하는 설도 나왔다. 하지만 두 번째 도읍인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의 경우, 평지성인 국내성(國內城)과 산성인 환도 산성(丸都山城)을 조합하여 도성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고구려 산성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로봉형 산성이다. 포곡형(包谷形)이라고도 하는데 골짜기를 가운데 두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산 능선과 골짜기 그리고 때때로 절벽들을 이용하여 허약하고 부실한 곳은 돌을 다듬어 쌓고, 경사가 급한 곳은 흙을 돋아 올려 보축하였다. 곳곳에 문을 만들어 놓았고, 대체로 정문에 해당하는 골짜기들이 모인 곳에는 견고하게 방어 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이러한 곳은 물이 풍부하여 장기 농성전을 펼칠 수가 있다. 환도산성(丸都山城) 등 정책적인 성들은 대부분 고로봉식 산성이다.

말안장처럼 2개의 봉우리를 둘러싼 말안장형[마안형(馬鞍形)]도 있다. 집안 북쪽인 유화현에 있는 나통산성(羅通山城)은 고로봉형과 마안형이 복합된 구조이다. 또 정상의 8부 능선을 둥글게 돌아가면서 쌓은 테뫼식(鉢卷式) 산성이 있는데, 초소나 소규모 병사가 지키는 전술적인 산성이다. 소수의 군대가 정찰 임무나 전술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 소규모로 만든 보루도 있다. 자연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고 큰 규모로 만들 목적으로 두 개의 성을 함께 붙인 양성 체제도 있다. 교통의 요충지인 협곡로를 차단하여 쌓은 차단성이 있는데, '관애(關隘)'라고 부르기도 한다. 관마(關馬) 산성(山城) , 망파령(望波嶺) 산성 등이 있다.

성의 시설물

성은 크기에 따라 분류한다. 대형 산성은 둘레 2㎞ 이상으로 설정하고, 중형 산성은 둘레 1∼2㎞, 그리고 소형 산성은 둘레 0.2∼1㎞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재료에 따라서 석성 토성, 토석성, 토석 혼축성, 책성(柵城) 등으로 구분한다. 사용된 돌은 일반적으로 화강암을 사용했으나 주로 그 현지에 많이 있는 석재를 사용했다. 대표적인 것은 나통 산성백암성이다. 성벽의 외벽은 쐐기형 돌로 쌓고 성벽 안쪽에는 돌이나 흙, 혹은 돌과 흙을 섞어 넣어 견고하게 축조했다. 또한 토목 공학적으로 안정성을 확보하고, 미의식을 고려하여 퇴물림 양식을 사용했으며, 큰 치의 경우에는 굽도리 양식을 사용하였다.

고구려 성은 전체적으로 구조뿐만 아니라 과학적이고 복잡하게 설계하여 방어 시설을 치밀하게 만들어 놓았다. 평지성은 쌓기에도 노력과 공력이 덜 들어가고 생활하기에도 편리하지만 상대적으로 방어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할 목적으로 몇 가지 구조물을 설치하였다. 그 중 하나가 해자이다. 성 둘레에 폭이 넓고 깊게 도랑을 파서 그대로 놓아 두거나 물을 채워서 적의 공격을 1차로 저지했다. 계곡물이나 강물이 흐르는 곳에는 따로 파지 않고 이를 최대한 활용했다.

외부로 통하는 성문은 방어에 가장 취약한 곳이다. 따라서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옹성(甕城) 구조로 만들었다. 두개의 벽이 만나는 지점을 엇갈리게 해서 서로의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게 한 다음에 양 벽이 만나는 곳에 문을 설치했다. 중기를 지나 후기로 가면 굴곡이 심한 S자형이나 항아리 모양을 이루고 심지어는 겹성으로 만들기도 했다. 적군이 이러한 성문을 통과하려면 정면만이 아니라 사방에서 공격을 받게 되어 있다. 옹성 구조는 국내성과 환도산성, 대성산성(大城山城) 등에서 확인된다.

치(雉)[馬面]는 평평한 성벽의 곳곳에 적을 공격하는 면적을 넓히기 위하여 성의 일부를 네모로 돌출시켜서 만든 시설물이다. 즉 방어군은 3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다. 대성산성에는 치가 69개가 있는데 치 사이의 간격은 평균 109m이다. 화살의 유효 사거리를 염두에 두고 그 간격을 정한 것이다. 국내성의 북벽 서벽에 흔적이 남아 있고, 백암성은 현재 5개가 남아 있으며, 장하(莊河)의 석성(石城)에도 있다.

성에는 적대(敵臺)가 있다. 이것은 성문 가까운 양쪽에 성벽과 같은 너비와 높이를 돌출시킨 망대(望臺)이다. 성문에 다가오는 적을 정면과 좌우에서 격퇴시키는 시설물이다. 이 두 시설은 성 위에서 시계(視界)와 사계(射界)를 넓히고 화살의 발사 각도를 최소 각도로 좁히게 하였다.

각루(角樓)가 있다. 이것은 성의 모서리를 지키는 시설로 성내의 전투를 지휘하는 보조 지휘소 역할을 한다. 국내성(國內城)요동성(遼東城)의 경우처럼 네모난 성곽은 성의 모서리에 직접 세우거나, 치와 마찬가지로 성벽 밖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만들기도 하였다. 각루 역시 전투 지휘와 성의 위엄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였다. 또 점장대를 설치했다. 점장대는 성 외부는 물론이고, 성 내부 전체를 관찰하고 지휘할 수 있는 높은 언덕에 두었는데, 때로는 최후까지 항전하는 장소의 역할도 하였다.

성벽에는 여장(女牆)(雉堞)이 있는데 이것은 성벽 위에 설치한 사격대로 치첩(雉堞)[성가퀴]이라고도 부른다. 성벽 위에 몸을 숨기고 접근하는 적을 사격하는 시설물로 치(마면)의 상층부에 대개 요철(凹凸)모양을 하고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물 저장고인 연못이다. 고구려가 장기 농성전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이 연못을 최대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오녀 산성천지(天池), 용담산성의 용담, 환도산성의 음마지(飮馬池), 대성산성의 100여 개의 연못이 그것이다. 물의 중요성은 사료에서 확인된다. 대무신왕 때인 AD 28년에 적들은 환도산성을 포위한 채 물이 떨어져서 항복하기를 성 바깥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고구려군이 수초에 싼 잉어를 보내자 성 안에 물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고 철수했다.

그 외에도 암문(暗門)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비밀 통로로서 평상시에는 성벽과 같이 막아두었다가, 필요시에는 통로로 사용했다. 이 암문은 성의 규모에 따라 달랐으며, 암문으로 통하는 성벽 안에는 대체로 군대의 비밀 집결 장소로서 활용하는 공지가 있다. 이러한 암문 외에 배수구로서의 수구문이 따로 있다.

성 중심 군사방어체계

고구려의 상 중심 군사방어체계에 대해서는 북한 학계에서 가장 먼저 연구했다. 북한 학계는 국경지대인 요하(遼河)에서 후기 도성인 평양성에 이르는 방어체계를 전초방어성(감시방어성), 전연방어성(기본방어성), 종심방어성(중간방어성), 수도방어성(최종방어성)으로 분류했다. 중국 학계와 일본 학계에서는 군사방어체계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 이후 고구려 성과 방어체계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중국 소재 고구려 성에 대한 검토와 남한 지역 고구려 성에 대한 조사 연구에 힘입은 것이다. 고구려의 방어체계에 대한 최근의 연구성과를 통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성과 국경지배에 여러 개의 성을 쌓아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국내성으로 도읍한 이후부터였다. 국내성 시기의 방어선은 3중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1차 방어선은 국경지대인 요동 평원과 혼강 유역 사이이다, 이곳에는 하천 연안로를 따라 고구려 성곽이 줄지어 분포하기 때문에 종심(縱深) 방어체계라 부른다. 2차 방어선은 혼강 우안으로 이곳의 성곽은 각 지류 연안을 따라 종심을 이루며 전체적으로는 호형(弧形)으로 배치되었으므로 호형·종심방어체계라 칭한다. 3차 방어선은 노령산맥 일대로 이곳의 성곽은 국내성을 중심으로 호형을 이루는데, 도성으로 향하는 모든 교통로를 봉쇄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것은 국내성을 방어하기 위한 도성외곽의 호형 방어체계이다.

고구려는 혼강 유역에서 노령산맥을 넘어 왕도로 향하는 모든 교통로에 산성이나 관애를 축조했다. 이 가운데 규모가 비교적 큰 패왕조산성, 성장립자산성, 와방구산성은 혼강 연안에서 집안지역으로 진입하는 교통로의 길목에 위치해 있고, 다른 소형 관애나 초소는 집안분지로 향하는 교통로 요충지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왕도 안에는 평지궁성인 국내성과 산성인 환도산성을 조합하여 도성체계를 구축하고, 적군이 쳐들어오는 경우 환도산성으로 들어가 항전을 했다.

5세기 전반에 고구려는 요동평원을 차지하고 북쪽으로 북류 송화강, 동쪽으로 두만강에 이르는 영역을 확보했고 남쪽으로 한강 이북 지역을 공격하여 58성 700촌을 차지했다. 400년에는 신라 왕의 요청에 따라 보병과 기병으로 이루어진 5만 명의 원정군을 보내 신라 국경 안에 들어와 있던 왜군과 가야군을 축출하였다. 427년에는 평양으로 천도했고, 475년에는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켜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 494년에는 이통하(伊通河) 유역의 농안(農安) 일대에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부여가 고구려에 투항했다. 이와 같이 5세기 이후 수도를 옮기고 영토가 확대된 만큼 군사방어체계도 재정비했다.

먼저 도성방어체계를 보면, 평양 천도 직후에는 현재의 평양시 동북 일대를 도성으로 삼았다. 군사 방어성은 대성산성으로 비정되는데, 둘레 7,076m인 포곡식 산성으로 장대터, 병영 터, 창고 터와 170여 개의 연못과 저수지가 확인되었다. 국내성 도읍기처럼 평지성과 산성을 조합하여 도성체제를 구축했다면 평양에도 대성산성과 세트가 되는 평지성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안학궁설과 청암리토성설이 제기되었지만 두 설 모두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안학궁은 고구려 석실봉토분 위에 조성되었고 발견되는 기와도 대부분 고구려 말기나 고려시기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 청암리토성에서는 궁궐이나 관아 터가 발견되지 않고 절터만 확인되었다. 이런 점에서 천도 이후 평지성을 만들지 않고 대성산성만 조영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4세기에 국내성-환도산성의 세트로 도성체계를 만들었는데 평양에서 평지성 없이 대성산성만 축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고구려는 552년부터 현재의 평양 시가지에 장안성을 건설하고 586년에 도성을 이곳으로 옮겼다. 장안성은 둘레 23km의 초대형 성곽으로 동·남·서 3면은 대동강과 보통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모란봉으로 가로막힌 천혜의 요새이다. 성문 터와 장대, 궁궐로 추정되는 건물지, 격자형 도로망 등이 확인되었다. 장안성은 북성과 내성은 산성, 중성과 외성은 평지성으로 되어 있는 복곽식 성곽으로 내성은 궁성, 중성은 관아와 귀족의 저택, 외성은 귀족이나 일반민의 거주지, 북성은 별궁이자 방어성이라고 보고 있다. 평지도성과 군사방어성을 하나로 일체화시킴으로써 방어력을 강화했고, 적군이 침입해도 도성의 시설물이나 물자를 온전히 보전한 채 항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평양에서 사방 30~50여 km 떨어진 거리에는 환상(環狀)으로 위성방어체계를 조성하고 그 외곽에도 이중 삼중의 방어성을 겹겹이 구축했다. 도읍의 북쪽에는 황룡산성, 숙천읍성, 안주성을 조성하고 남쪽에는 황주성, 휴류산성, 서흥 대현산성, 평산 태백산성, 신원 장수산성, 해주 수양 산성 등 중대형 포곡식 산성을 축조하여 도성을 방어하면서 지방지배와 군사방어를 동시에 수행하도록 했다.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 영역은 서북쪽으로 요하일대, 북쪽으로 북류 송화강, 동북쪽으로 두만강유역, 남쪽으로 한반도 중부지역에 이르렀다. 고구려는 국경지대에 크고 작은 성들을 조성하여 군사 방어체계를 견고하게 구축했다.

서북 방면은 고구려가 말기까지 가장 주력을 기울였던 곳으로 중원왕조나 유목제국의 침공에 대비하여 요하 유역으로부터 평양성에 이르는 곳에 군사 방어체계를 조성했다. 이곳에는 최전방의 전연 방어선(前沿防禦線), 요동~압록강의 제1선 종심 방어체계, 압록강~청천강의 제2선 종심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최전방의 전연 방어선은 요하를 건넌 적군을 막기 위한 방어벽으로 요동평원에서 천산산맥으로 나아가는 진입로 입구와 산줄기에서 하곡평지로 돌출한 산에 포곡식 산성이 배치되었다. 요하를 건너는 적군을 저지하기 위해 무려라(武勵邏) 등의 성보를 요한 연안에 축조했고, 말기에는 송료대평원을 가로질러 천리장성을 축조하기도 했다. 요동~압록강 구간의 제1선 종심방어체계는 천산산맥 횡단로를 따라 구축되었다. 제2선 종심방어체계는 압록강 하류에서 평양성으로 가는 연해와 내륙 두 경로를 따라 구축되었다.

한반도 중남부 방면에는 임진강 유역, 양주분지, 한강 북안의 아차산 일대에 소형 보루를 밀집 배치하여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동북 방면의 두만강 유역에는 중심부의 중핵지역과 주변부, 말갈의 집단 거주지인 외곽지역으로 구분하여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했다. 북류 송화강 방면에는 휘발하 일대에 유화(柳花) 나통산성(羅通山城)을 중심으로 각 성곽을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국경 지대에 크고 작은 성을 축조하여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지역지배와 군사업무를 적절히 수행하도록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성 중심의 방어체계는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과정에서 제대로 효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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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광주, 「임진강 이남 지역의 성곽분포와 방어체계」(『7세기 국제정세와 고구려-수·당 전쟁』, 동북아역사재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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