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 삼종사 묘

한자 大倧敎 三倧師 墓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용성진 청호촌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대종교의 삼종사의 묘
관련인물 서일, 나철, 김교헌
문물|보호단위등급 화룡시 문화 유물 보호 단위
문화재 지정 일시 1991년
현 소재지 길림성 화룡현 용성향 청호촌청호 종산의 작은 구릉
원소재지 화룡현 청파호
정의

길림성 화룡시 용성향 청호촌에 있는 대종교의 삼종사 백포서일, 홍암나철, 무원김교헌의 묘.

개설

나철[1863~1916]은 전남 보성에서 출생한 인물로 1907년 자신회를 조직하여 을사오적을 처단하고자 하였다. 1909년 단군교를 만들고, 1910년 교명을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1911년 7월 만주로 이주하여 포교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6년 8월 황해도구월산에서 순국하였다.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은 1919년 「대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22~1923년 국내외 시교당 46개 소를 건립하여 대종교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3년 11월 영안현에서 순국하였다.

백포서일은 1910~1920년대 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무장 투쟁론자였다. 중광단·대한 정의단·북로 군정서의 최고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이 지속적으로 무장 투쟁을 전개할 수 있도록 민족 의식을 심어주었다. 서일은 1921년 8월 북만주 밀산에서 일제의 지원을 받은 토비(土匪)에 의하여 독립군 병사들이 다수 희생된 사건이 있자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하였다.

위치

대종교 삼종사 묘역은 화룡시 청호(淸湖) 마을 맞은 편 언덕 위에 있다.

형태

나철의 비석은 가로 22㎝, 높이 95㎝, 측면 22㎝이고, 김교헌의 비석은 가로 30㎝, 높이 79㎝, 측면 6㎝이며, 서일의 비석은 가로 36㎝, 높이 105㎝, 측면 13㎝이다.

금석문

나철의 비석 앞면에는 한자로 “대종교 대종사 홍암 나철 선생 신해지장(大倧敎大宗師弘巖羅喆先生神骸之藏)”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개천 4151년 입(開天四千一百五十一年立)”이라는 글자가 새져져 있다. 김교헌의 비석 앞면에는 “대종교 종사 무원 김교헌 단해지장(大倧敎宗師茂園金敎獻檀骸之藏)”이라 글자가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개천 4158년 입(開天四千一百五十八年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서일의 비석 앞면에는 “대종교 종사 백포 형 서일 단해지장(大倧敎宗師白圃兄徐一檀骸之藏)”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개천 4384년 입(開天四千三百八十四年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묘역 안내문의 앞면에는 “화룡시 문화 유물 보호 단위(和龍市文化遺物保護單位), 반일 지사 묘역(反日志士墓葬), 화룡시 인민 정부 1991년 9월 1일 공포(和龍市 人民 政府 一九九一年 九月 一日 公布)”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안내문 뒷면에는 “반일 지사 라철서일김교현은 20세기 전반기에 동북 지구에서 한때 화룡시 청파호를 기지로 반일 계몽 운동과 반일 교육 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민중의 반일 의식을 높이고 인민의 반일 사상 각오를 높이기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였으며 반일 무장 투쟁을 준비하고 전개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현황

3기의 무덤과 각각 그 주인을 알려주는 비석 3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그 옆에 화룡시 인민 정부가 1991년 화룡시 문화 유적 보호 단위로 지정하면서 세운 안내 비석이 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맞서 환인·환웅·환검의 삼위 일체인 ‘한얼님’을 숭배한 대종교는 독립운동가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정신적 구심이었다. 특히 대종교북간도 무장 독립운동의 이념이자 실천적 기반으로 포교 자체가 곧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청산리 전투를 치른 북로 군정서의 대원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참고문헌
  • 강용권,『죽은자의 숨결, 산자의 발길』하(장산, 1996)
  • 독립 기념관, 한국 근현대사 학회, 『국외 항일 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 1(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2002)
  • 박환, 『(박환교수의) 만주 지역 한인 유적 답사기』(국학 자료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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