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란구 학살 사건

한자 依蘭溝 虐殺 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한인 학살 사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0년 10월
정의

1920년 10월 일본군이 의란구에 침입하여 한인들을 학살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20년 10월 9일 조선 주둔 일본군은 약 2만의 병력으로 간도 지역을 무력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 병력의 주 전력은 조선 주둔 일본군 19사단이었다. 19사단은 기림 지대(磯林支隊)·목촌 지대(木村支隊)·동 지대(東支隊) 등으로 나누어 간도 지역을 무력 침공하였다. 회령에 위치한 보병 제38여단 사령부와 보병 제75연대를 근간으로 한 기림 지대는 주둔지와 가까운 훈춘 방면으로 침략을 시도하였다. 나남에 위치한 보병 제76연대를 중심으로 목촌 지대는 온성에서 왕청 방향으로 침략을 시도하였다. 또한 나남에 위치한 보병 제73연대 제2대대, 제73연대 제3대대를 근간으로 하는 동 지대는 회령 등지에서 용정 방면으로의 침략을 시도하였다.

이들 간도 침공 일본군 부대들은 간도 일대의 한인들을 불령 선인이라는 명목으로 1920년 10월부터 1921년 1월까지 한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하고, 한인 부락을 초토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무자비하고 잔악한 방법으로 한인을 학살하고 부락을 방화하고 약탈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대대적인 간도 지역 한인 학살을 ‘간도 참변’ 혹은 ‘경신 참변’이라 한다.

경과

의란구는 연길시로부터 왕청으로 가는 도중에 위치하고 있다. 의란구 학살 사건은 의란구가 속한 지인향의 구룡평(九龍坪), 고성촌(古城村), 유채촌(柳菜村), 태양촌(太陽村), 연화촌(蓮花村) 등지에서 발생하였다.

1920년 당시 의란구에는 간도 국민회와 의군부가 있었다. 국민회는 유채구와 구룡평을 중심으로, 방초령에는 국민회군의 사관 훈련소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고성촌·연화촌 등지에는 의군부 본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의란구는 당시 독립군 부대의 본거지라 할 수 있었다.

1920년 10월부터 일본군은 의란구 일대를 여러 차례 무력으로 침공하였다. 10월 20일, 일본군 19사단 이시츠카[石塚] 대대는 의란구에 침입하여 이동근·이종옹·김득산·윤남극·강경성·김해룡·김순지·김락세·이붕재 등을 살해하였다. 4일 뒤 10월 24일 일본군 74연대는 또 의란구에서 양만홍·이태미·이치근·이렬 등 10여 명을 살해하고 학교 한 채와 민가 다섯 채를 불태웠다.

1920년 11월 3일, 일본군 76연대는 북의란구에서 항일 사상을 고취하고 항일 부대의 군자금 모집과 정보 수송 등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농민 이국화·이일재·김렬·이명초·이창옥·김성운·이종란·이종눌·이여익·이여일·이여영·이여국·이병재·허익·최병조 등 16명을 학살하였다.

1920년 11월 3일, 5일 76 연대는 기무라 대좌의 지휘하에 북의란구에서 불령 선인의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김창홍, 노우선, 김렬의 집을 비롯한 31채 민가를 소각하였다. 역시 같은 달 3일과 4일 태양촌에서는 불령 단체를 조직하고 항일 사상을 고취하였다는 이유로 교사 노우선 등 2명과 농민 이주향·이수악 등 13명을 죽였다.

1920년 11월 5일, 일본군은 의군부 총무 최우익, 서무부장 이을, 홍정필 등 10명을 살해하였다.

당시 연변에 파견되어 현지를 조사한 『대한 신보』 기자는 『독립 신문』[1920년 12월 19일자]에 “의란구 남쪽은 전혀 30여 호 되는 이성(李性) 촌인데 3명이 근히 성명을 변해야 해탈되고 그 여의 전수가 학살되었으며 모씨의 4형제는 소화(燒火)되는 가옥 중에 던져 넣어 분살(焚殺)하였다 합니다. 그 외에 수 3명, 혹은 10여 명의 학살은 없는 데가 없습니다. 방화도 그러합니다.”라고 보도하였다.

참고문헌
  • 중국 조선 민족 력사 발자취 총서 편집 위원회, 『개척』중국 조선 민족 력사 발자취 총서(1), 민족출판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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