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혁

한자 許赫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정미의병|중어학원|부민단 단장
출생 시기/일시 1851년 10월 23일
활동 시기/일시 1905년
활동 시기/일시 1912년
활동 시기/일시 1912년
활동 시기/일시 1912년
몰년 시기/일시 1939년 10월 21일
추모 시기/일시 1968년
추모 시기/일시 1991년
출생지 경상북도 선산
거주|이주지 중국 만주
활동지 한성
활동지 경기도 연천
활동지 서간도 통화현
활동지 합화현(哈化縣)
정의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 및 교육 활동을 펼친 독립운동가.

가계

의병 대장 허위(許蔿)의 형이다.

활동 사항

허혁은 의병대장 허위(許蔿)의 형으로 경상북도 지례(智禮)에서 1851년 10월 23일 태어났다. 이명은 허혁(許赫), 호는 성산(性山). 1905년 을사 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반대 의지를 적극적으로 관철하기 위하여 을사오적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그 후 동지 4백여 명을 규합하여 경기도 연천(連天) 등지에서 거의하여 활약하였으며 의병 운동에 비협조적인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912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김동삼(金東三)·유인식(柳寅植) 등과 함께 중어 학원(中語學院)을 개설하여 한중 친선 및 한족의 이익을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합화현(哈化縣)에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초대 단장에 취임하였는데, 이 단체는 남만주 일대에 이주한 개척 농민의 자치 기관으로 애족(愛族)·구국 운동 등의 사업을 전개하여 음으로 양으로 광복 운동에 기여한 바 컸다.

부민단은 1911년 경학사(耕學社)가 대흉년으로 해산되자, 1912년 이상룡(李相龍) 등이 재만 한인의 복리 증진, 자활 대책의 강구, 자녀 교육, 애국 청년의 군사 훈련, 독립운동 기지 조성 등을 목표로 조직하였다. 단장 허혁을 중심으로, 부단장 김동삼(金東三), 서무 김형식(金衡植), 유서단총(柳西團總) 방기전(方基甸), 유동단총(柳東團總) 황병문(黃炳文), 통동단총(通東團總) 최명수(崔明洙), 통서단총(通西團總) 최여명(崔汝明), 흥동단총(興東團總) 김진호(金鎭浩)를 선임하여 중앙 조직을 구성하였다.

1919년까지 자활과 교육 사업에 주력하여 수십만의 이주 교민을 보호하고 수천 명의 애국 청년을 양성함으로써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 해 4월 유하(柳河)·통화·흥경(興京)·환인(桓仁)·집안(集安) 등지의 한인 지도자들이 모여, 남만주의 독립운동의 총본영인 군정부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자치 기관인 한족회(韓族會)로 발전적 개편을 이룩하였다. 이후에도 허혁만주 지역에서 교육 사업 등을 통해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1939년 10월 21일 별세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김승학, 『한국 독립사』, (독립 문화사, 1965)
  • 『한국 독립운동사』3, (국사 편찬 위원회, 1967)
  • 『독립운동사』5, (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 1973)
  • 윤병석, 『독립군사』, (지식 산업사, 1990)
  • 박은식 저, 남만성 역,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 (서문당,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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