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朴長浩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관동의병|대한독립단 도총재|광복군총영 |
| 출생 시기/일시 | 185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5일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5월 |
| 몰년 시기/일시 | 1921년 7월 |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 출생지 | 황해도 장연 |
| 거주|이주지 | 중국 만주 |
| 활동지 | 강원도 홍천 |
| 활동지 |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 서구대화사(柳河縣三源堡西構大化斜) |
| 활동지 | 요령성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 |
한말 관동 의병으로, 만주로 이주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박장호는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으로 1859년 출생하였다. 박장호는 한말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유인석(柳麟錫)·홍재학(洪在鶴) 등과 함께 여러 차례 상소하여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침탈되자 1906년 홍천(洪川)에서 의거하여 관동(關東) 지역 의병을 지휘하였다. 1907년에는 운강이강년(雲岡李康秊)과 함께 연합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되어 국내에서의 항쟁이 불가능해지자 박장호는 계속적인 투쟁을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이진룡(李鎭龍)·조맹선(趙孟善) 등과 활동하였다.
1919년에는 국내에서 3.1 독립운동이 일어나 만주로 건너오는 청년들이 수십만에 이르자 1919년 4월 15일 각지에 산재해 있는 의병 영수·유림수뇌·보약사(保約社) 대표·농무계(農務) 대표·포수단(砲手團) 대표 등 560여 명이 유하현 삼원보 서구대화사(柳河縣 三源堡 西構大化斜)에 회집하여 종래의 개별적인 행동을 지양하고 단일체로 통합하여 체계화한 항전을 전개하고자 대한 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고 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때 박장호는 대한독립단의 최고 책임자인 도총재(都總裁)에 추대되었다. 박장호는 부총재에 온당백삼규(溫當白三奎), 총단장 조맹선, 군사부장 전덕원(全德元) 등의 간부를 임명하였다. 또 각 현(縣)에 지단(支團)·분단(分團)을 설치하고 보민회(保民會)·강립단(康立團) 등 친일단체의 숙청에 노력하였다. 국내외 모두 100여 개소의 지단과 지부를 설치하고, 만주지역에는 거류 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여 구관(區管)을 두고 10구에 단장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하게 하였다. 국내의 지단조직은 국내 총지단장에 홍제업(洪濟業), 평안북도정우범(鄭禹範), 평안남도안창일(安昌一), 경기도한덕리(韓悳履), 용천군이후관(李厚觀), 철산군안병철(安秉哲), 영변군신태익(申泰翼), 정주군조석균(趙錫均), 태천군백낙기(白樂基), 영유이항로(李恒老), 가산오봉희(吳鳳熙), 수안최일호(崔一浩) 등이었다. 만주지방 조직으로는 장백현 총지단장에 유일우, 집안현 유수림자(楡樹林子)최남표(崔南表), 집안현 외차구(外岔溝)홍승국(洪承國) 등이었다. 이들은 3, 4명씩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남북도의 조선총독부 예하 경찰을 습격하고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대시켜갔다. 8월 최고 1,500명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그 중 700명의 독립군을 하얼빈(哈爾濱) 주둔 백계 러시아부대에 파견해 군사훈련을 받게 하고, 9월경 노령(露領)으로도 2개 소대를 보냈다. 이들은 시베리아에서 훈련과 무기 구입에 주력하였다. 12월 본부 밑에 4개 중대를 편성해 남만주 제1사단이라 하고, 무송현(撫松縣)에 사단본부를 설치하였다.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연통제 실시에 따라 조병준이 평안북도 독판(督辦)이 되어 공채를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3, 4월 결사대들이 평안도 신의주·의주 등에서 친일세력의 처단에 주력하였다. 또한, 대한 독립단의 목적인 남만주와 국내 세력과 연계를 통해 독립의 완전한 성취를 도모하고자 전국적으로 독립군 모집과 군자금 모금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중에서도 태천(泰川) 지단에서는 유림 김인수(金仁叟) 등의 활동으로 다수 단원을 포섭해, 본단 내지분치기관임시통칙(內地分置機關臨時通則)에 의해 의용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폭약을 구입, 관공서 파괴를 계획하던 중 다수의 단원이 붙잡히기도 하였다. 유일우·김병연(金秉淵)·박기연(朴基淵) 등은 장백현 일대에서 많은 자금을 모금했으며, 안도(安圖)·무송현 등지와 연락하면서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대한독립단은 연호문제로 노년층과 청년층이 대립하는 가운데 단군기원 또는 융희를 주장하는 기원(紀元) 독립단과 대한민국 연호 사용을 주장한 민국(民國) 독립단으로 분열되었다. 박장호는 전덕원(全德元)·이웅해(李雄海)·김평식(金平植) 등과 같이 기원 독립단, 즉 구왕조(舊王朝)에 충성하는 복벽 운동(復辟運動)에 주력하는 수구파(守舊派)에 속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임시정부와 공동보조를 취하게 되어 1921년 5월에는 군사활동을 단일화시키기 위한 광복군 총영(光復軍總營)으로 개편되자 이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박장호는 일제가 파견한 밀정 김헌(金憲)에게 암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