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星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정의단|북로군정서 총재부 비서장|간북북부총판부 참사 |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12월 7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3월 |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 출생지 | 함경남도 원산 |
| 거주|이주지 | 중국 길림성 |
| 활동지 | 길림성 왕청현 |
| 활동지 | 길림성 왕청현 서대파구(吉林省汪淸縣西大波溝) |
| 활동지 | 북간도 연길·화룡·돈화·액목 |
일제 강점기 간도 지역에서 무장 투쟁을 한 함경남도 원산 출신 독립운동가.
김성은 함경남도 원산(元山) 사람으로 1890년 12월 7일 출생하였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양현(梁玄) 등과 함께 길림성 왕청현(吉林省 汪淸縣)에서 중광단(重光團)의 토대위에 무장 독립투쟁을 벌이기 위하여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고 강령을 만들어 발표하여 단원을 모집하는 한편, 신문을 발간하여 재만 한인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려 하였다. 또 같은 해 7월에는 일본 내각 원경(原敬) 총리대신에게 서일·계화·김붕(金鵬)·김일봉(金一鋒)·정신(鄭信) 등과 함께 건백서(建白書)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후 한국 무관학교 시절부터 날래며 힘이 세기로 유명했고, 또 오성학교(五星學校)교감으로 있다가 광복단(光復團) 사건에 연좌되어 3년간 옥중생활을 하고 북만을 찾아온 감좌진(金佐鎭)을 맞이하여 1919년 8월 7일에 정의단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여 본격적인 무장 독립 투쟁을 진행하려 하였다.
김성은 서일·현천묵(玄天默)·김좌진·계화·이장녕(李章寧)·김규식(金奎植)·이범석(裏範奭)·조성환(曺成煥)·박성태(朴成泰)·정신·김찬수(金燦洙)·박두희(朴斗熙)·홍충희(洪忠熹)·이홍래(李鴻來)·윤창현(尹昌鉉) 등과 같이 북로 군정서를 조직하고 주요 멤버로서 활동하였으며, 1920년 8월에는 총재부 비서장으로서 일하였다. 또한 김성은 1920년 10월에는 임시정부의 연통제 조직인 재만 독립군의 재편과정에서 결성된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瓣府)의 참사(參事)로서 주병수(朱秉洙)·최정국(崔正國) 등과 같이 일하였다.
김성은 1926년 3월경 신민부원(新民府員)으로서 이단(李檀)·김준(金俊) 등과 함께 간도에서 1920년 독립군이 산중에 묻어 두었던 장총 20전과 탄환 2,000발을 발굴하여 운반하려다가 중국 관헌 보위단(保衛團)에 체포되었다. 이후 경박호(鏡泊湖) 부근에서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었다고 전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1991년에는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