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黃炳吉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기독교교우회 회장|훈춘만세시위|훈춘 한민회 경호부장 |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몰년 시기/일시 | 1920년 6월 1일 |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 출생지 | 함경북도 경원군 경원면 |
| 거주|이주지 | 러시아연해주, 중국만주 |
| 활동지 | 길림성 훈춘현 |
| 활동지 | 길림성 훈춘현 |
| 활동지 | 북간도 동구 남별리(北間島東溝南別里) |
| 활동지 | 길림성 훈춘현 |
| 활동지 | 길림성 훈춘현 |
| 묘소 | 대전 |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
황병길은 1883년 함경북도 경원군경원면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丙喆, 丙喆, 丙吉이다. 1900년대, 황병길의 나이가 23세 전후에 연해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1년 12월 연해주에서 훈춘으로 다시 이주하였다. 이 시기에 이동휘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1913년 12월 기독교 교우회를 결성하여 회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또 훈춘 기독교 교우회 부속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군사교육 및 독립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이동휘, 이동춘, 김영학 등과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황병길은 1917년 10월 훈춘 영사분관에 체포된 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황병길은 3월 20일 700여 명의 한인들과 함께 훈춘 영사분관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4월 29일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일본 영사관은 중국 측에게 그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중국 측은 일제의 요청을 거절하고 곧 석방하였다.
황병길은 1919년 북간도 동구 남별리(北間島東溝南別里)에서대한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고 교제과장에 선임되어, 회장 이명순(李明淳), 부회장 박관일(朴貫一) 등을 보좌하였다. 또 훈춘현 춘화향 4도구(春化鄕四道溝)를 중심으로 2백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19년 3월에는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박치환(朴致煥)과 함께 건국회(建國會)를 조직하고 노령으로부터 3백정의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하고 국내진입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19년 7월, 황병길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서 이동휘(李東輝)·문창범(文昌範)·김립(金立)·오영선(吳永善) 등 2백여 명의 독립운동가들과 신한민회(新韓民會)를 조직하였는데, 이 조직에서는 적극적인 투쟁이 논의되어 국내진공까지 논의가 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사도구(四道溝)에서 이명순(李明淳) 등과 함께 북간도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고 결사대 2,000명 모집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1920년 1월 훈춘에서 의용군 1,300여 명을 무장시켰고, 조선 애국 부인회를 조직하기도 하여 무장 투쟁만이 아닌 전 방위적인 민족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1920년 3월부터는 의용군이 본격적으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1,300여 명을 무장시켜 경원(慶源)·온성(穩城) 등 국경지방을 습격하였다. 다만 이때 황병길은 병세가 악화되어 전면에 나서지는 못하였다. 같은 시기 합마당 상촌에서 홍범도(洪範圖)·구춘선(具春先)·이범윤(李範允) 등 독립군 대표들과 만나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방안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훈춘 한민회(韓民會)의 경호부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황병길은 1920년 6월 1일 투병생활 끝에 별세하였다.
국립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