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奎冕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목사|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한의용군 군사위원회 위원장 |
| 출생 시기/일시 | 1881년 3월 16일 |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9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
| 몰년 시기/일시 | 1969년 |
| 추모 시기/일시 | 1967년 |
| 추모 시기/일시 | 2002년 |
| 출생지 | 함경북도 경흥군 |
| 묘소 | 모스크바 루쥐녜츠키이 통로(Proezd LuzhNetskii) 2번지노보제비치 공동 묘지 |
일제 강점기 만주,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활동한 목사이자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규면은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출신으로 서울배재 학당(培材學堂)과 한성 사범 학교(漢城師範學校)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만주 지방으로 이주하여 1907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고 신교육 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1910년부터는 기독교 신자가 되어 교사이자 목사로 활동하고자 했다. 김규면은 독립 교회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포교 및 독립운동을 병행하려 했다. 그러나 1913년 미국 선교사 게일(G.S. Gale) 등이 조선 총독부의 포교 규칙(布敎規則)을 승인하려 하자 반대하여 의견 충돌이 일어났고,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신민단을 조직, 적극적인 민족 운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북간도에서 독립 교회(獨立敎會) 성리교(聖理敎)를 창립하였다. 성리교의 조직과 자금을 기반으로 중국왕청현(汪淸縣) 춘화사(春華社)에서 대한 신민단(大韓新民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임되어 흑정자(黑頂子) 일대, 나자구(羅子溝)와 초모정자(草帽頂子)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에는 이동휘(李東輝)·박진순(朴鎭淳)·김립(金立) 등 30여 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한인 사회당(韓人社會黨)을 결성하는데 참가하였다. 신민단이 한인 사회당과 결합한 뒤 김규면은 한인 사회당의 부의장 겸 군사부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전투 시에는 고려 빨치산 군대 군사위원회 위원장, 프리아무르주 군정 의회 전권 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김춘범(金春範),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무관 학교를 나자구 지방에 설립하는 계획을 추진하며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1919년 11월 중순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용(李鏞)·김좌두(金佐斗)·김하석(金夏錫)·김만겸(金萬謙) 등과 함께 독립단(獨立團)을 조직하고 신한촌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러시아의 니콜스크-우스리스크 지방으로 이동하여 무장 독립 투쟁을 위하여 한인 무장 부대로 조직된 혈성단(血誠團)의 명예 단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또 동만주 지역에 있는 대한 의민회(大韓義民會)·대한 국민회(大韓國民會)·대한 광복단(大韓光復團)을 병합한 총판부(總辦府)를 조직, 단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활동 지역에 공산당의 근거를 설치할 것을 협의했고, 국제당 제2차 대회 선언서에 한인 사회당 대표로 서명하기도 했다.
이후 김규면은 1921년 6월 벌어졌던 봉오동 전투에 참전하는 등 직접적인 무력 투쟁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러다가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이 발생하기 직전에 오하묵(吳夏默)의 특무대에 체포되었다. 당시 오하묵은 고려 혁명 군정 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의 부사령관으로 이르쿠츠크 집단의 요인이었다. 체포된 김규면이 소지한 상자에는 3만여 원의 금은전(金銀錢)과 비밀 문서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겨우 처형을 면하고 군비단(軍備團)을 근간으로 조직된 한국 의용군사회(韓國義勇軍事會)의 고문이 되었으며, 1921년 7월에는 대한 의용군 군사위원회를 재결성, 위원장이 되었다. 1922년 9월 노령 한인 무장 부대가 고려 혁명군(高麗革命軍)으로 통합될 때 참모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2년 11월 시베리아 내전 시 러시아 적군(赤軍)에 가담하여 한인 연합 부대 군사 위원으로 참전, 백군에게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하였다.
이후 김규면은 1927년 중국에서의 활동을 완전히 끝마치고 러시아연해주로 돌아와 블라디보스토크의 서점에서 판매원으로 일을 하기도 하였고, 빨치산 농업 조합의 생산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931년 조선 공산당(朝鮮共産黨)과 고려 공산 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재조직 사건에 관여하여 검거될 당시 탈주하였으며, 1934년 이후 모스크바 등지에서 연금 생활을 하였다. 자서전적 회상록인 『노병 김규면 비망록(老兵金奎冕備忘錄)』을 남겼다. 모스크바그르임 등지에서 생활하다가 1969년 사망하였다.
저술로는 『노병 김규면 비망록』이 있다.
모스크바루쥐녜츠키이 통로(Proezd Luzhnetskii) 2번지노보제비치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김규면은 1967년 러시아 10월 혁명 50주년을 기념하여 소련 정부로부터 적기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