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奎植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북로군정서|대한 독립 군단|고려혁명군 총사령|신민부 |
| 출생 시기/일시 | 1882년 1월 15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 몰년 시기/일시 | 1931년 4월 10일 |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20년 10월 |
| 출생지 |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
| 거주|이주지 | 중국 만주, 노령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길림성 왕청현 서대파구(吉林省汪淸縣西大波溝) |
| 활동지 | 밀산부 |
| 활동지 | 연길현 명월구(明月溝) |
| 활동지 | 길림성 영안현 |
| 활동지 | 길림성 길림현 |
경기도 출신으로 만주 등지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김규식은 1882년 1월 15일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에서 출생했다. 본적은 경기도 양주. 호는 노은(蘆隱), 이명(異名)은 서도(瑞道), 별명은 호장군(虎將軍)이다.
김규식은 한말 육군 참위(參尉)로서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 당하자 포천·연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차에 걸쳐 일군을 대파하였으나 체포되어 2년간의 유배 생활을 했으며,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8월, 김규식은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북로 군정서를 조직하여 무장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북로군정서는 무장 투쟁론을 지지하여 소련과 일본 또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의 적국이 되는 국가와 한 편이 되어 독립을 이룬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김규식은 중대장으로 근무를 시작하였고, 왕청현(汪淸縣) 십리평(十里坪)에 세운 단기속성 사관 학교인 사관 연성소의 교관으로서 김좌진·이장녕(李章寧)·이범석(李範奭)·김홍국(金洪國)·최상운(崔尙雲) 등과 함께 청년들을 교육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북로군정서의 제2연대 제1대대장으로서 전투에 참여하여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북로 군정서군은 일본군을 기습, 일본군 전위부대 200여 명을 전멸시켰다. 그 뒤 밀산(密山)에서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 독립단(大韓獨立團)·재간도 대한 국민회·대한 신민회(大韓新民會)·도독부(都督府)·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대한 정의 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야단(野團) 등 여러 단체의 군대를 통합하여 대한 독립 군단(大韓獨立軍團)을 편성하고 총재에 서일(徐一), 부총재에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이 각각 취임하였다. 김규식은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참모총장 이장녕(李章寧)·여단장 이청천(李靑天)이하 3,500여 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노령의 자유시(自由市)로 갔다. 독립군은 이곳에서 효과적인 독립 투쟁을 위해 1,400여 명의 병력을 가진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을 조직하였다. 이때 김규식은 홍범도, 이청천 등과 함께 참모부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독립군은 자유시에서 참변을 겪고 말았고 김규식은 다시 소만국경을 넘어 옛 근거지인 연길현(延吉縣)으로 돌아왔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1922년 3월 3백명의 독립군이 소만국경으로 이전하여 추위와 식량난으로 무한한 고통에 있다는 급보가 도착하자 그 구제에 노력하였으며 상해 노병회(上海勞兵會)에서도 50원을 모금하여 독립군에게 보내왔다. 이를 통해 물질적인 역경을 겨우 면한 김규식은 이범석과 함께 1923년 5월,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서 고려 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총사령에 선출되어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고려혁명군은 병농 일치(兵農一致)의 제도인 둔경제(屯耕制)를 실시하여 농사를 짓고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소련령으로부터 비밀리에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1925년에는 김좌진·김혁(金赫) 등이 북구 영안현(北溝寧安懸)에서 민족주의 대표를 망라하여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자 김규식도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양기탁(梁起鐸)을 위원장으로 하는 고려 혁명당(高麗革命黨)이 4월 5일 길림성의 호텔에서 조직되자, 중앙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조직 당시의 당원수는 약 1천 5백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기적인 항일 투쟁은 2세 국민들의 교육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연수현(延壽懸) 태평촌(太平村)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다.
김규식은 1928년에 신민부의 활동구역 내에 창당된 고려 국민당의 군사부 위원을 맡았다. 1930년경에는 한국 독립당에서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연수현 학교 운영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1931년 3월 한족자치연합회 본부가 있던 주하현(珠河縣) 이붕해(李鵬海)의 집으로 가서 최악(崔岳)·홍진(洪震)·신숙(申肅) 등을 만나 한인 자제들에 대한 교육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이때 백운봉·최호 등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유해는 주하현마이강에 뿌려졌다.
정부는 1963년 그의 공을 기려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