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安武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한제국 군대 교련관|국민회 군사령관|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 |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6월 29일 |
| 수학 시기/일시 | 1899년 |
| 활동시기/일시 | 189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6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2월 |
| 몰년 시기/일시 | 1924년 |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20년 6월 |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20년 10월 |
| 출생지 | 함경북도 경성 |
| 거주|이주지 | 간도 |
| 학교|수학지 | 한성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함경북도 경성 |
| 활동지 | 함경북도 무산 |
| 활동지 | 북간도 |
| 활동지 | 만주 화룡현 봉오동 |
| 활동지 | 만주 화룡현 청산리 |
| 활동지 | 중국 상해 |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안무는 함북 경성(鏡城) 사람으로 1883년 6월 29일에 태어났다. 1899년 대한 제국진위대 병사로 입대하여 하사관을 거쳐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될 때까지 교련관으로서 일하였다. 군대 해산 후에는 함북 경성의 함일 학교와 무산의 보성 학교 체육 교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안무는 1910년 경술 국치 이후 만주 지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였다. 1919년, 이동휘, 김약연 등과 함께 대한 국민회를 조직하고 대한 국민회의 직속 군사 조직이자 관할 구역 내의 경찰군 역할도 담당하였던 국민회군(國民會軍)을 창설하였다. 이때 안무는 국민회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에 안무는 대한 독립군, 군무 도독부군과 연합 사령부를 구성하고 최진동(崔振東) 사령관의 부관으로서 활약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독립군이 일본군 150여 명을 사살하고, 중상자 2백여 명, 경상자 1백여 명의 전과를 올렸던 봉오동 전투에 참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1920년 10월,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등이 연합하여 화룡현 이·삼도구 서북쪽과 어랑출의 심산 장곡 지대에서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 2만여 명의 병력과 월등한 화력을 갖춘 일본군과 10여 차례의 접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안무의 부대는 어랑촌 전투, 완루구 전투, 고동천 전투 등에서 홍범도 부대와 연합,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반격이 있자 1921년 6월 노령의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여 부대를 재편하고 러시아 측의 지원을 얻어내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독립군은 러시아 백군과의 교전에서 많은 전공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런 독립군의 지원과는 별개로 자신들의 국제 정치적 기반을 위해서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자유시 참변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인원들이 사망하거나 체포당했는데, 당시 안무는 탈출하여 북간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안무는 구춘선 등과 함께 왕청현 나자구 일대에서 독립군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3년 2월 상해에서 국민 대표 회의가 열리자 국민회군 대표로서 참여하여 같은 해 6월 국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9월 6일, 안무는 용정(龍井) 영사관 경찰에게 발각되어 모아산 부근에서 교전 중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자혜(慈惠) 병원에서 치료하였으나 하루 뒤인 9월 7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