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溶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동로군 사령관|한국의용군사회 사령관|이만전투|조국광복회 |
| 출생 시기/일시 | 1888년 4월 7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21년 |
| 출생지 | 함경북도 북청 |
| 거주|이주지 | 북간도, 러시아연해주 |
| 학교|수학지 | 중국 |
| 활동지 | 북간도 |
| 활동지 | 러시아치타 |
| 활동지 | 러시아치타 |
| 활동지 | 연해주 |
| 활동지 | 연해주 |
| 활동지 | 만주 |
| 활동지 | 함경북도 북청 |
이용은 헤이그 밀사였던 이준(李儁)의 맏아들로 함경북도 북청에서 1888년 4월 7일 태어났다. 부친 이준이 자결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절강 군관 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용은 1919년 4월에는 신민단과 한인 사회당의 군사부 담당 중앙 위원을 역임하였다. 이후 1920년 5월 임시 정부로부터 동로군(東路軍)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북간도(北間島)의 명월구(明月溝)에 사관 학교를 설립, 사관 양성에 힘썼다.
일본군이 간도 참변을 일으키자 이용은 러시아로 넘어갔다. 1921년 1월 이준은 한인 군사위원회의 결성을 선포하고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또 같은 달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에서 전한 임시 군사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3월에는 ‘전한 의병 의회’에서 대한 의용군 군사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이용은 자유시 참변 때 붙잡혀 이르크츠크로 압송되어가는 도중 1921년 7월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 뒤 연해주로 돌아와서 한국 의용군사회(韓國義勇軍事會)를 조직하고 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같은 해 11월 이만 전투에서 인민 혁명군과 협력하여 백위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2월까지 여러 전투에 계속 참전하였다.
1922년 9월 이용은 고려 혁명군정청이 설립될 때 고려 혁명군 블라디보스토크 총지부 북부 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 공산당 연합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시베리아 내전 후에는 소련 사관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5년 소련군과 함께 중국광동으로 가서 포병 연대에 근무하기도 하였으며, 1930년에는 만주로 이동, 조선 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해 10월에는 중국 공산당 동만특위 통신연락부장을 맡았다.
1932년 11월 조양천(朝陽川)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한 후 북청에 거주 제한 조치를 받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용은 1936년 11월 조국 광복회에 가입하였다.
해방 후 이용은 1946년까지 북청군의 초대 인민 위원장을 지내다가 그해 3월 월남하였다. 1947년 신진당 부당수를 지내고, 1948년 4월 남북 연석 회의 참석을 위해 월북하였다. 월북 후 도시경영상, 사법상, 무임소상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8월 18일 별세하였다.
애국 열사릉에 안장되었다.
북한 정부는 1990년 조국통일상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