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韓大震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한국민회 실행위원|지나혁명단 실행위원 |
| 출생 시기/일시 | 미상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출생지 | 미상 |
| 활동지 | 북간도 용정 |
| 활동지 | 왕청현(汪淸縣) 춘화향(春華鄕) |
| 활동지 | 북간도 |
일제 강점기 북간도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한대진은 1872년 충청남도에서 태어난 뒤 북간도로 망명하여 대한 국민회[북간도 국민회]에서 활동하였다. 대한 국민회는 1919년 3월 13일 용정(龍井)에서 전개된 만세운동 직후 설립된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에서 비롯되었다. 그해 4월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된 이후 대한 국민회로 개칭하였다. 대한 국민회는 자치 민정기관(民政機關)으로 본부인 총부(摠部)를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 하마탕(蛤蟆塘)에 두고, 산하에 5개의 지방회를 두었다. 당시 조직은 회장 구춘선(具春先), 부회장 강구만(姜九萬), 비서 겸 재무 고동환(高東煥) 등으로 구성되었다.
한대진은 1920년에 연길현 숭례향 명월구에 본부를 둔 서부총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5월 15일 대한 국민회는 왕청현(汪淸縣) 춘화향(春華鄕)에서 각 지부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여 사관 학교 설립과 독립군 양성, 국내에서의 군자금 모집 활동, 러시아로부터 무기 구입, 중국 혁명단과의 친밀한 관계 유지 등을 결의하였다. 이 무렵 그는 실행 위원에 선정되었다.
이에 1920년 10월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국내에 부하들을 파견하였으나, 5월 1일 안리현(安履賢), 문종희(文鍾熙), 이왕담(李汪錟), 이화선(李化善), 이배식(李培式), 한형식(韓炯軾), 김한송(金漢松), 김계태(金桂太), 이효근(李孝根), 양진홍(梁珍鴻), 곽두익(郭斗益), 김계락(姜啓洛), 김귀문(金貴文), 김약연(金若淵), 안남규(安南奎) 등이 함흥경찰서(咸興警察署)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1921년 3월 안도현(安圖縣)에서 경찰국(警察局) 조직, 동지 규합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8월 간도 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촉구하는 취지서에 국민회 대표로 서명하였다. 이후 그는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연해주(沿海州)로 이동하여 1923년 4월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집행위원(執行委員)에 선임되었다. 이후 행적은 기록이 미비하여 알 수 없다.
2011년 한대진은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