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尹海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권업회|간민회|전로한족회중앙총회부회장|청구신문사 주필|한성정부 평정관|국민대표회의 부의장 |
| 출생 시기/일시 | 1888년 3월 5일 |
| 수학 시기/일시 | 191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5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1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 출생지 | 함경남도 영흥 |
| 거주|이주지 | 연해주 니콜라스크 |
| 학교|수학지 | 한성 |
| 활동지 |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
| 활동지 | 동삼성(東三省) 국자가(局子街) |
| 활동지 | 연해주 니콜라스크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모스크바 |
일제 강점기 러시아연해주와 만주, 상해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윤해(尹海)는 함남 영흥(永興)에서 1883년 태어났다. 1910년 보성 전문 학교를 졸업한 후 국권이 피탈되자 연해주로 망명하여 니콜라스크를 근거지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윤해는 1911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설된 권업회(勸業會)에 참가하였다. 1915년 3월 이봉우(李鳳雨) 등과 함께 간민회(墾民會)를 조직하여 동삼성(東三省) 국자가(局子街)를 근거지로 한인 자치 활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917년 12월 윤해는 노령(露領)니콜라스크에서 문창범(文昌範)·원세훈(元世勳)·고창일(高昌一)·김립(金立) 등과 함께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조직,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또 박은식(朴殷植)·남공선(南公善) 등과 기관지인 청구 신문사(靑邱新聞社) 주필로도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대한 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서 고창일과 함께 윤해를 파리 강화 회의(巴里講和會議)로 파견하였으나, 볼세비키 혁명으로 인하여 파리 강화 회의가 끝난 9월 26일에야 파리에 도착하여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1919년 윤해는 국내에서 결성된 한성 정부(漢城政府)의 평정관(評定官)으로 선임되었으며, 1922년 12월 20일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 대표회(國民代表會) 소집을 위한 예비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1923년 1월 23일 상해에서 국민 대표 회의가 개최되자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이 생기자 신숙(申肅)·원세훈 등과 함께 창조파에 가담하여 새로운 정부 구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가 결렬되자 창조파는 국민 위원회와 국무 위원회(國務委員會)를 조직하였는데 윤해는 의장에 선임된 뒤 ‘조선 공화국(朝鮮共和國)’ 창립을 주도하였다.
당시 윤해는 1923년 상해에서 창조 구락부(創造俱樂部)를 조직하고 대표가 되어 민족 운동의 분열을 막아보려고 노력하였으며, 같은 해 8월 국민 대표 회의 창조파인 박용만(朴容萬)·원세훈·신숙·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조선 공화국’을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러시아 정부에 의해 추방당했다. 그 후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길림성(吉林省) 영고탑(寧古塔)으로 갔다가 1924년 북경(北京)으로 돌아갔다.
윤해는 1934년 소련으로 망명, 모스크바 국제 공산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행적이나 사망 시기는 전해지는 바 없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