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朴贊翊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종교 정교|대한독립의용군|광복군총사령부|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대한민국 임시 정부 외무부 외사국장|일제 밀정처단|중경정부 법무부장|주화대표단장(駐華代表團長) |
| 출생 시기/일시 | 1884년 1월 2일 |
| 수학 시기/일시 | 1904년 |
| 수학 시기/일시 | 1908년 4월 |
| 수학 시기/일시 | 191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 몰년 시기/일시 | 1949년 2월 20일 |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 출생지 |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
| 거주|이주지 | 중국 길림성 용정 |
| 학교|수학지 | 한성 |
| 학교|수학지 | 한성 |
| 활동지 |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構) 청파동(靑坡洞) |
| 활동지 | 만주 길림성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중경 |
| 활동지 | 중경 |
| 활동지 | 중경 |
일제 강점기 대종교인으로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외교 분야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박찬익은 1884년 1월 2일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서 태어났다. 1904년 관립 상공 학교(官立商工學校)에 재학중 민족 운동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1906년에는 안창호(安昌浩), 이시영(李始榮)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박찬익은 1908년 4월 관립 공업 전습소(官立工業專習所) 염직과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1911년 2월 만주 용정(龍井) 지역으로 망명하여 중국 관립 학교에서 일어 교사로 재직하며 중국어를 배웠다.
망명 후 박찬익은 이상설(李相卨)·백순(白純)·나철(羅喆) 등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하여 교인으로 활동하였다. 박찬익은 교단 내에서 정교(正敎)직을 맡아 업무를 처리하기도 하였다. 1912년에는 중국 관헌의 도움을 얻어내어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構) 청파동(靑坡洞)에 한국인 학교를 설치하고 지역 청년들에게 애국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 그해 2월, 상해에 있던 신규식(申圭植)의 지령을 받아 같은 달 27일 길림에서 여시형(呂時亨),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대한 독립 의용군(大韓獨立義勇軍)을 조직하였다.
박찬익은 1913년 1월에 조직된 간민 중앙 총회의 의사원으로 선임되기도 했으며 1917년에는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신규식 등과 활동하며 상해에서 동제사(同濟社)를 만들었다. 이후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조달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또 1919년 3월에 발표된 「대한 독립 선언서」에 39인 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12월에는 무기 구입을 위해 니콜리스크로 가기도 했으며, 1920년 4월에는 급진대 및 청년단 조직에 힘썼다.
1921년 3월 박찬익은 이범윤 등과 함께 광복군 총사령부를 조직하였으며 4월, 임시 의정원경기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7월 7일에는 임시 정부 외무부 외사국장(外事局長) 겸 외무차장 대리로 임명되어 임시 정부의 외교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박찬익은 특히 대중국 외교에 주력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의 손문(孫文)이 광동(廣東)에 중국 호법 정부(中國護法政府)를 수립하자 외교총장 신규식(申圭植)을 수행, 임시 정부를 승인받는 데 기여하였으며, 1922년 2월에는 광동 주재 임시 정부 대표로 호법 정부와의 외교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1922년 신규식이 서거하자 동제사 이사장이 되었다.
박찬익은 1923년 4월에 외사국장으로 봉천에 특파되어 만주의 독립운동을 지원할 수 있도록 중국 정부 관리와 외교 접촉을 벌였다. 1925년 10월 미쓰야 협약으로 인해 이강훈, 신갑수 등이 구속되자 석방을 위해 교섭에 나서기도 하였고, 1926년에는 임시 집정관 단기서(段祺瑞)를 만나 한국 독립운동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또 1927년 북만주에서 유일 독립당이 추진되자, 외교위원장을 맡았다.
1930년 12월에는 대한 독립당 대표로 남경(南京) 정부에 파견되기도 하였으며, 1931년 5월에는 남경의 국민당 전당 대회에 임시 정부 대표로 안호상(安浩相)과 함께 참석하였다. 1932년 윤봉길의 의거 후 임시 정부를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하여 중국 정부와 교섭하여 많은 지원을 받아내면서 김구의 도피를 도왔다. 1933년 5월에는 김구, 안공근, 엄항섭과 함께 남경 중앙 군관 학교(南京中央軍官學校)에서 장개석과 면담, 낙양 군관 학교 내에 한국 독립군 양성을 위한 특별반을 설치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33년 8월에는 의열 투쟁에 가담하기도 하였는데, 옥관빈(玉觀彬)과 밀정 유인발(柳寅發) 등을 저격 처단하는 계획에 참여하였다.
이후 1934년에 박찬익은 한국 독립당 남경 지부의 간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9년에는 다시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임시 정부가 중경(重慶)으로 옮긴 뒤에는 법무부장, 그해 10월에는 국무 위원으로 임명되어 광복시까지 임시 정부의 중책을 역임하였다. 한편 1942년 10월에는 김규식(金圭植)·신익희(申翼熙)·김성숙(金星淑)·김원봉(金元鳳)·엄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한중 문화 협회의 한국측 이사로 선임되었다. 1944년 6월 5일에는 김구와 장개석의 비밀 회담을 성사시켜 5백만 원의 차관과 매월 활동비 1백만 원의 지원을 얻어냈다.
8·15 광복 후 박찬익은 임시 정부 주화대표단장(駐華代表團長)으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안전한 귀환에 힘썼다. 그는 한인들의 귀환이 마무리되는 1946년 7월까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박찬익은 1948년 4월 19일 귀국하였고, 1949년 2월 20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