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黃學秀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동명학교|대한민국 임시정부|서로 군정서|신민부|한국 광복군 |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7월 9일 |
| 수학 시기/일시 | 189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1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8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9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8월 |
| 몰년 시기/일시 | 1953년 3월 12일 |
| 출생지 | 충청북도 제천 |
| 거주|이주지 | 중국상해 |
| 학교|수학지 | 한성 |
| 활동지 | 충청북도 제천 |
| 활동지 | 충청북도 제천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유하현 삼원보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흑룡강성 목단강시 영안시 |
| 활동지 | 길림성 |
| 활동지 | 길림성 주하현 |
| 활동지 |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
| 활동지 | 중경 |
| 활동지 | 중경 |
| 묘소 | 서울 |
일제 강점기 상해 임시 정부와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황학수는 1879년 7월 9일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났다. 호는 몽호(夢乎), 이명은 이국현(李國賢), 자는 필옥(弼玉). 1898년 대한 제국 무관 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부위(副尉)로 근무하다가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귀향하였다.
고향에서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1919년 3·1운동이 이후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1919년 임시 정부 국내 조사원에 임명되어 충북 제천 지방의 조사를 담당하였으며, 이듬해 1월에는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에 선출되었다. 1920년 2월에는 군무부 비서 국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남만주로 건너가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장과 중앙 집행 위원 및 군사 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23년 3월에는 한국 노병회(韓國勞兵會)에 조곤(趙坤)·김정(金政) 등과 일반 회원으로 입회하였다가, 1926년 3월에 특별 회원이 되었다. 1924년 7월에는 상해에서 개최되고 있던 국민 대표 회의에서 국민 위원회 후보 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7년에는 만주로 이동,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신민부가 재개편될 때 참모부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 군사부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같은 해 12월 혁신 의회(革新議會)와 국민부(國民府)의 2개 단체가 새로 구성될 때 혁신 의회의 군사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2월 상해 임시 정부에서 홍진(洪震)을 파견해오자 그는 이청천(李靑天)·신숙(申肅)·이장녕(李章寧) 등과 협의하여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그 직속으로 한국 독립군을 조직하였다.
1932년 11월 한국 독립당 중앙당 대회에서 한국 독립군의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또한 조선 혁명당(朝鮮革命黨)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1938년 5월 조선혁명당 대표로 참석하여 민족 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당하는데 큰 힘을 보탰다. 1938년 7월에는 임시정부 군사 위원에 임명되어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 파견되었으며, 1939년 10월에는 다시 임시 의정원 충청도 선출 의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940년 9월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자 그는 광복군 사령부 부관장(副官長)에 임명되었다가 동년 10월에는 서안(西安)에서 총사령 대리로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 임시 정부 군사 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고, 1943년 3월에는 임시 정부 국무 위원 생계 부장(生計部長)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53년 3월 12일 별세하였다.
서울국립 묘지 임정 묘역에 안장되었다.
한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