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洪震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상해 직할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평리원 검사|한성정부|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국무령|한국독립당 당수|한국민족혁명당|비상국민회의 의장 |
| 출생 시기/일시 | 1877년 8월 27일 |
| 수학 시기/일시 | 189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30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7월 7일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9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2월 |
| 몰년 시기/일시 | 1946년 9월 9일 |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 출생지 | 서울 차동 |
| 거주|이주지 | 중국상해 |
| 거주|이주지 | 남경(南京) |
| 학교|수학지 | 한성 |
| 활동지 | 한성, 충청도 |
| 활동지 | 충청북도 청주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남경 |
| 활동지 | 중경 |
| 활동지 | 서울 |
| 묘소 | 서울 동작동 |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홍진은 1877년 8월 27일 서울 차동(車洞)에서 태어났다. 호는 만호(晩湖), 만오(晩悟)이며, 이명으로 홍진(洪鎭), 이춘(李春), 우봉(又鳳), 봉근(鳳根), 진(鎭) 등을 썼다. 1898년 법관 양성소(法官養成所)를 졸업한 뒤 한성 평리원(漢城平理院) 주사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평리원 판사로 승진하였고, 1905년 충청북도충주 재판소 검사로 전임되었다. 대한 제국 당시 한성 평리원(漢城平理院) 검사, 충청도 검찰청 검사 등을 역임하면서 애국 지사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힘썼다.
홍진은 1910년 국권을 강탈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충북 청주군의 연락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7일, 홍진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고 한성오(韓聖五)의 집에 모여 한성 정부의 수립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4월 2일 인천만국 공원(萬國公園)에서 임시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고 서울에서 국민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같은 해 4월 8일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해로 간 홍진은 1919년 4월 30일 임시 의정원에 가담하여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임시 의정원 법제위원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1년 4월 상해 한인교민단장(韓人僑民團長)에 선출되었으며, 5월에는 제3대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대(對) 태평양회의 외교 후원회를 조직하고 간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24년 4월 임시 정부의 법무총장직을 사임하고 광소성 부근에 은거하였다.
홍진은 1926년 7월 7일 임시 정부의 국무령(國務領)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12월까지 국무령으로 있다가 국무 위원과 함께 일괄 사직하고,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의정활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한국 유일 독립당 촉성회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0년 7월에는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고, 그 당수로서 군민회의(軍民會議)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자 한국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홍진은 1933년 겨울 남경(南京)으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1934년 2월 신한 독립당(新韓獨立黨)을 만들었고, 1935년 7월 다시 의열단(義烈團) 등 단체들과 협의하여 한국 민족 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으로 발전시켰다. 1939년 10월에는 국무 위원으로 임명되어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되는 데에 힘을 보탰다. 1942년 10월, 임시 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43년 5월 중경에서 개최된 한국 독립당 전당대회에서는 중앙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는 등 해방 직전까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홍진은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12월 2일 임정 요인 2차 귀국 때에 임시 정부 요인들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다.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반탁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1946년 2월 비상 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46년 9월 9일 별세하였다.
국립 현충원 임시 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