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한자 鄭信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무오 독립 선언서|북로군정서 인사국장|국민대표회의|상해교민단회계검사원|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원비서장|신민부|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한국독립당 선전부장
출생 시기/일시 1898년
활동 시기/일시 1918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활동 시기/일시 1922년 10월
활동 시기/일시 1923년 2월
활동 시기/일시 1924년
활동 시기/일시 1924년
활동 시기/일시 1925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활동 시기/일시 1929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몰년 시기/일시 1931년 1월
추모 시기/일시 1963년
출생지 함경남도 홍원
활동지 만주 길림
활동지 길림성 왕청현(吉林省汪淸縣)
활동지 상해
활동지 상해
활동지 상해
활동지 길림성 영안현
활동지 길림성
활동지 길림성 위하현
활동지 길림성 합장현(哈長縣)
정의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정신은 1989년함경남도 홍원(洪源)에서 태어났다. 호는 일우(一雨), 이명은 윤(潤). 국권 침탈 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8년 여준(呂準)·정안립(鄭安立)·박성태(朴性泰)·박찬익(朴贊翊) 등 39명의 재만 동포 대표의 한 사람으로 「무오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당시 대종교 단체인 중광단(重光團)에 입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9년 8월에 정신서일(徐一)·김좌진(金左鎭) 등과 함께 길림성 왕청현(吉林省 汪淸縣)에 군정부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12월 군정부가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되자 인사국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에는 간북 북부 총판부(墾北北部總辦府) 재무관서 참사(參事)로 부임했고, 1922년 10월에는 상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 대표 회의(國民代表會議)에 북간도대한 독립군 대표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2월에는 지청천(池靑天)·배천택(裵天澤)·신일헌(申日憲)·김동삼(金東三)·최기현(崔基鉉)·김철(金澈) 등과 함께 군사분과위원이 되었다. 1924년에는 상해 대한 교민단의 회계검사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임시 정부의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25년에는 북만주로 돌아와 영안현(寧安縣)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연락부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신민부 개편 때 정신은 경리부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길림에서 개최된 독립운동 단체 통합 회의에 신민부 대표로 참가, 군민의회(軍民議會)의 민사부 위원(民事部委員)으로도 활약하였다. 1929년에는 신민부 군정파, 참의부(參議府), 정의부(正義府)의 3부를 통합하여 민족 유일당 재만 책진회(策進會)를 조직하여 민족 운동의 분열을 막고 통일된 노선으로 민족 해방 운동에 집중하도록 노력하였다. 이때 정신김좌진·황학수(黃學秀)·김시야(金時野) 등과 함께 신민부 군정파 대표로서 혁신 의회(革新議會) 및 임시 기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중동선(中東線) 일대에서 김좌진·김종진(金宗鎭)·이을규(李乙奎) 등과 함께 한족 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여 한인들을 위해 실천을 우선시하는 민족 운동에 힘쓰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지청천·홍진(洪震) 등과 함께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고 선전부장으로서 일하다가, 1931년 합장현(哈長縣) 부근에서 공산당원에게 피살되었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 오재식, 『항일순국열사전』(행정신문사, 1959)
  • 김후경·신재홍,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한국민족운동연구소, 1971)
  • 『독립운동사』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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