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敎獻 |
|---|---|
| 분야 | 종교/신종교|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종교인|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종교인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병조참의|독립협회|동래부사|대종교 2대 교주|무오 독립 선언서|북로군정서|청산리전투|워싱턴회의 |
| 출생 시기/일시 | 1868년 |
| 출가|서품 시기/일시 | 1909년 |
| 활동 시기/일시 | 1885년 |
| 활동 시기/일시 | 189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9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1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12월 |
| 몰년 시기/일시 | 1923년 |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 출생지 |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역삼리 55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만주 화룡현 |
| 활동지 | 길림성 |
| 활동지 | 화룡현 삼도구 |
| 활동지 | 길림성 영안현 |
김교헌은 1885년 경기도 광주 출생으로 명문가의 후예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한 이후 병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내다가 1898년 독립 협회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만민 공동회 운동을 비롯한 대중 계몽 운동을 하였다. 1903년에는 『문헌비고』 편집 위원이 되어 활동하는 등 학술 활동을 통해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다.
김교헌은 1906년 동래 감리 겸 부산항 재판소 판사(東萊監理兼釜山港裁判所判事) 및 동래 부사로 재직하면서 일제를 등에 업고 경제 수탈을 자행하던 일본인들에 맞서 이를 제지하다가 통감부의 강압에 의해 잠시 관직을 떠나기도 했다. 그후 조선 광문회(朝鮮光文會)에 들어가 현채(玄采)·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고전 간행 사업에 참가하였다.
김교헌은 일찍이 민족의 기원과 역사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대종교가 중광(重光)된 해부터 대종교 교인이 되어 각종 문헌을 수집 정리하여 대종교의 역사를 정립하였다. 김교헌은 이러한 민족의 역사를 밝히는 것이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총본사(總本司)의 부전무(副典務)·경리부장을 지내고,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남도본사전리(南道本司典理)·총본사전강(總本司典講)을 역임하면서 대종교계 핵심 인물로 대두하였다. 이러한 김교헌의 활동을 통해 대종교는 일대 중흥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1916년 9월 김교헌은 나철(羅喆)의 뒤를 이어 대종교의 제2대 교주(都司敎)가 되었다. 1917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이전하여 『신단실기(神壇實記)』와 『신단민사(神壇民史)』를 서술하여 민족 종교의 강화를 통한 독립운동 전개를 도모하는 한편 재만 한인에 대한 민족 교육에 전념하였다.
김교헌은 1918년 11월 해외에서 선언된 「대한 독립 선언서」(「무오 독립 선언서」)에 39명 중 1인으로 서명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 선언서의 이념과 사상은 대종교의 자주 독립 정신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해 12월 대종교 교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고, 총재에 서일(徐一)을 임명하는 등 적극적인 무력 투쟁을 전개, 1920년 9월 청산리 독립 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두는 데 큰 조력을 하였다.
1921년 11월에는 미국워싱턴에서 열린 국제 회의에 임시 정부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도록 외교 교섭을 벌이기도 했다. 그후 일본군의 탄압이 심해지자 총본사를 다시 영안현(寧安縣)으로 옮겨 포교(布敎)를 통한 독립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김교헌은 만주 전역에 걸친 일본군의 토벌 작전으로 독립운동 및 교단의 기반이 크게 붕괴된 이후 1923년 비분과 과로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화룡현 삼종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