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克華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흑룡강성 하얼빈시 |
| 시대 | 현대/현대 |
| 성별 | 남 |
|---|---|
| 출생 시기/일시 | 1888 |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9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12월 |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6월 3일 |
| 출생지 | 경기도 양평 |
| 학교|수학지 | 서울 중앙학교 |
| 활동지 | 만주·관내 지역 |
일제 강점기 만주·관내 지역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이극화는 경기도 양평의 빈농 출신으로 유년 시절에 서울서 중앙 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 4월 항일 단체 청년동지회를 결성하였고, 1919년 1월에는 자유단(自由團) 결성에 참여하여 『자유보』를 발행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주로 선전 활동에 종사하다 그해 6월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8월 이극화는 한족 신보사(韓族新報社)를 건립하고 『새배달』이라는 일간 신문의 책임 주필로 활동하였다. 그해 10월에는 재만(在滿) 독립운동자 후원회를 조직, 위원장이 되었고, 1920년 12월 일제의 간도 참변을 피해 북경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6월 비밀리에 귀국하던 중 중국안동현(安東縣)에서 피체되었다. 1923년 6월 이극화는 코르뷰로(조선 공산당 중앙 총국) 국내부에 가입하였고, 그해 11월 화요회 중앙 위원을 지냈다.
1925년 이극화는 조선 공산당 창건에 참가하여 중앙 위원회 후보 위원 및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고, 1926년 6·10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검거를 피해 9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중국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기고 중국 공산당 상해 한인 특별 지부를 조직, 서기가 되었다.
1928년 1월 이극화는 재관내(在關內) 한국 독립당 촉성 연합회 상해 촉성회 당단 서기(黨團書記) 겸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9년 조선인과 중국인 등이 모여 결성한 동방 반제국주의 동맹 위원이 되었고, 그해 11월 재만 조선인 반일본 제국주의 동맹을 지도하였다.
그 뒤 이극화는 다시 만주로 이동하여 1930년 3월 조공 만주 총국(화요파)에서 활동하였고, 1931년 1월 북만 특위 위원이 되었으며, 9월 중국 혁명 호제회(互濟會) 강소성 위원회 법남구 한인 분회에 가입하였다.
1930년 12월 이극화는 중국 공산당 상해 한인 지부 책임자로 취임하였고, 상해 한인 반제 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서무부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1932년 1월부터 조선 공산당 재건을 위해 『코뮤니스트』를 출판하는 데 관여하다가, 그해 12월 체포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이극화는 출옥 후 경기도 양주에서 농업에 종사하였고, 1943년 화요파 성원들과 함께 조선 공산주의자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1944년 7월 다시 검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