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文漢模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흑룡강성 하얼빈시 상지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별 | 남 |
|---|---|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6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 몰년 시기/일시 | 1936년 |
| 출생지 | 황해도 |
| 활동지 | 주하현 일대 |
일제 강점기 중국주하현 일대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문한모는 1929년 주하현 양주하의 신창 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조선 공산당(화요파) 조직의 책임자로 항일 투쟁을 활발히 하였으며, 신창 학교 고학년 학생들인 원대명·정명조·문무희 등을 양성하여 독립운동의 길로 인도하였다.
문한모는 1930년 6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1931년 일제에 의한 만주 침략 이후에 주하현 하동으로 옮겨와 하동 지부에서 활동하였으며, 1933년 초 하동 당 지부의 임시 책임자가 되었다.
1933년 4월 하동 사건으로 당 조직이 파괴되어 많은 당원들이 체포되고 지하에 들어가게 되어 하동 일대의 투쟁이 암흑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문한모는 주하 중심 현위 의 지시에 따라 하동 농장 10계의 계장인 장경칠과의 안면을 이용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문한모는 지중화·지영애 등과 중국인 당원 1명과 함께 당 소조를 운영하였으며, 부녀회를 조직하여 선전 삐라를 붙이는 등 하동 당 조직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1935년 학생들이 교실 천장에 문한모가 숨겨 놓은 항일 선전 삐라를 발견하였고,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장경칠 계장에게 알렸다. 이에 문한모가 체포되었다. 평양 감옥으로 이송된 문한모는 갖은 고문 끝에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풀려나와 아성현 평산에 살던 형 문찬모의 집에서 1년 가까이 병조리하다 1936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