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한자 武亭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보정 육군군관학교|홍군 대장정|화북 조선독립동맹|화북 조선혁명 군사학교
출생 시기/일시 1905년
수학 시기/일시 1919년
수학 시기/일시 1924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활동 시기/일시 1923년
활동 시기/일시 1925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활동 시기/일시 1928년
활동 시기/일시 1929년
활동 시기/일시 1934년 10월
활동 시기/일시 1941년 1월 10일
활동 시기/일시 1942년 7월
활동 시기/일시 1942년
몰년 시기/일시 1956년
출생지 함경북도 경성군
학교|수학지 서울
하북성 보정시
활동지 하북성 보정시
북경
상해
호남성 동정호
강서성에서 섬서성까지
산서성 료현 동욕
태항산
정의

일제 강점기 만주·화북 지역에서 활동한 군인 출신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무정(武亭)은 함경북도 경성 출생이다. 14세때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그 후 서울 기독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중앙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를 내지 못하여 18세 때에 퇴학당하였다.

무정은 북경으로 망명하여 19세 때 보정 군관 학교(保定軍官學校, 講武堂) 포병과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924년에 포병과를 졸업한 후 포병 장교가 되었다. 그 이듬해 북경에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무정은 장개석(蔣介石) 집권 이후 상해로 가서 중국 공산당 상해 조선인 지부에서 활동하는 등 지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상해 폭동 당시 무정은 책임자의 한사람으로서 영국 경찰에 체포되어 2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이후 중국 소비에트 지역으로 이동하여 중국 노농 홍군에 입대하였다.

무정은 서금에서 팽덕회(彭德懷)가 전위 서기로 있던 홍군 제3군단에 소속되었다. 1930년 7월에 제3군단이 동정호 전투를 할 때였다. 적에게서 노획한 야전포 4문과 산포 2문을 수중에 장악하고 있었던 무정은 팽덕회를 찾아가 대포로 적들에게 반격하겠다는 계획을 말했다. 팽덕회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무정은 전사들에게 포사격 요령을 가르치고, 적들이 다가오자 직접 적을 조준하고 사격하여 물리쳤다. 그 후 무정은 홍군 제3군단의 포병연장이 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전 홍군에 알려졌고 홍군에 조선인이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1934년 10월, 2만 5천리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홍군 대학과 팽양 보병 학교, 공량 보병 학교 및 특과 학교 등 4개소의 홍군 학교 장병들로 홍색 간부단을 편성하였는데 단장은 진갱(陳賡), 정치 위원은 송임궁(宋任窮)이었다. 홍군 특과 학교 교장 겸 포병영장으로 있던 무정은 중앙 군사위원회 기관 인원들로 구성된 군사위원회 제1중대 제3대대의 사령원 겸 정치 위원으로 임명되어 장정(長征)의 길에 올랐다. 중앙 홍군에는 조선인이 원래 10여 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장정의 길에 올랐다. 하지만 장정 도중에 조선인 전사들은 대부분이 희생되고 섬북에 도착한 사람은 무정양림 두 사람 뿐이었다.

1936년 2월 홍군은 중앙의 지시에 따라 황하(黃河)를 건너 동정을 시작하였다. 홍군 동정 부대는 팽덕회가 지휘하였는데 무정도 출정하였다. 황하 도강 작전은 장정 부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무정은 정찰 임무를 완성하였다. 한 달 동안의 준비가 끝난 뒤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홍군 제15군단 제75사의 참모장이던 양림은 소속 제223단 1영을 지휘하여 도하 작전의 선봉대가 되고 무정은 참모가 되었다. 작전 임무를 완수한 후 무정은 홍군 대학에서 특과영 영장으로 있으면서 포병 간부와 포사격수를 양성하였다.

1937년 8월 홍군은 국민 혁명군 제8로군(국민 혁명군 제18집단군)으로 개편되었다. 무정은 팔로군 총부 작전과장으로 임명되었다. 항일 전쟁의 형세가 새롭게 변화함에 따라 팔로군 총부에서는 포병단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총부에서는 무정에게 그가 거느리고 있는 병력을 기초로 평양, 평성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총부 직속 유격 제2대를 접수하여 포병단을 편성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총 병력이 천여 명에 달하는 포병단이 건립되었는데 포병단에는 6개 련이 있고 그 외에 봉사 기관과 관찰 통신대 및 선전대가 있었다. 이 포병단은 팔로군 역사상 처음으로 창건된 포병단이었다. 팔로군 총부에서는 무정을 단장으로, 구창선을 정치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1940년 백단 대전(百團大戰)이 끝난 후 팔로군 내의 조선민족 간부 양성에 중점을 두라는 중앙의 지시에 따라 무정은 관내 여러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인 항일 단체들을 통일하고 연합하는 사업을 맡게 되었다. 무정은 중앙의 지시를 받고 1941년 1월 10일에 팔로군 항일 근거지인 산서성 요현 동욕에서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를 창립하였다. 회장에 무정, 조직부장에 이유민, 선전부장에 장지광, 경제부장에 한덕지로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1941년 4월에서 6월 사이에 조선 의용대 대부분의 대원들이 차례로 낙양에서 산서 요현 동욕에 도착하였고 따라서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와 접촉하고 연계하였다. 1941년 7월 산서 료현 동욕에 있는 조선 의용대 는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의 영도를 받아들여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로 개편되었다.

1942년 7월 11일부터 14일까지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는 태항산에서 제4차 대표 대회를 열었다. 대회는 여러 차례의 토론을 거쳐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를 확대, 개편하고 조선 독립 동맹으로 명칭을 바꾸며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할 것을 전원일치로 결의하였다. 독립 동맹과 조선 의용군을 군정 연합의 통일체로 규정하였다. 화북 조선 독립 동맹 제1기 집행위원은 김두봉, 무정, 최창익, 박효삼, 김학무, 채야화, 김창만, 왕지연, 이유민, 진한중, 이춘암이었고 조선 의용군 사령은 무정, 부사령은 박효삼, 박일우였다. 인재 양성을 위해 조선 독립 동맹과 조선 의용군 총부는 군정 학교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화북 조선 간부 훈련반으로 이름했다가 1944년에 화북 조선 혁명 군사 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광복까지 이 학교의 교장을 무정이 직접 맡았다.

묘소

장사는 조선으로 옮겨와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 김순기,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장군』(요령민족출판사, 1991)
  • 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국 사회주의 운동 인명 사전』(창작과 비평사. 1996)
  • 서명훈, 『하얼빈시 조선 민족 백년 사화』,(민족 출판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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