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추악

한자 李秋岳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별
출생 시기/일시 1901년
수학 시기/일시 1927년 8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활동 시기/일시 1925년 2월
활동 시기/일시 1925년 6월
활동 시기/일시 1925년 가을
활동 시기/일시 1932년 여름
활동 시기/일시 1934년 봄
활동 시기/일시 1936년 2월
활동 시기/일시 1936년 8월
몰년 시기/일시 1936년 9월 3일
출생지 평안남도
학교|수학지 평양 숭실학교
정의

일제 강점기 중국하얼빈 등 만주 각지에서 활동한 여성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가계

1901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7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났다.

활동 사항

이추악은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고 양림을 만나게 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4년 이추악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헤어진 양림을 찾아 광동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양림과 결혼한 후 1925년 2월 광동 혁명군 선전대 사업 일군으로 진형명 군벌을 치는 제1차 동정에 참가한 데 이어 1925년 6월 양희민·류진환 군벌을 치는 제2차 동정에도 참가하였다.

1925년 가을 이추악은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나,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이 공산당을 탄압하자, 1927년 8월 소련모스크바 동방 대학에 유학하였다. 1930년 봄에는 돌아와 심양동만특위에서의 활동을 시작으로 1931년 9·18 사변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 부녀 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1932년 여름에는 중국 공산당 주하 중심 현위 위원 및 부녀 부장, 1934년 봄에는 중국 공산당 주하현 철북구위 서기를 지냈다.

이추악은 1934년 8월 중국 공산당 연수·방정 특별 지부 서기의 중임을 맡았으며, 1936년 2월 통화현에서 활동하다가 1936년 8월 밀고로 피체되어 그해 9월 3일 순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24년 가을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오면서 지은 시가 있다.

잘 있거라 금수강산아

잘 있거라 물결 높은 압록강아

잘 있거라 부모형제 벗들이여

잘 있거라 수난받는 겨레들이여

우리는 어머니 젖줄을 떼운 노예

지루한 노예생활 우리 꿈 깨쳤더라

자유의 종소리 높이 울릴 그날에

끝없는 고역에서 우리는 벗어나리라

무거운 쇠사슬 끊어버리고

일어나라 기한에 떠는 노예들아

가슴 속 열혈이 밀물처럼 술렁이면

우리 힘 금성철벽 이룩하리라

단합된 무쇠주먹 휘두를 때

간악한 일제는 쫓겨가리니

만리타향으로 떠나는 몸

한 가슴 끓는 피를 안고 가노라

거기에 억압받는 형제가 있어

정의의 깃발 아래 싸우는 투사

진리를 받들고 진격하는 자매

어서 오라 나를 반겨 손짓하는데

내 피와 내 살을 바쳐 싸우면

휘몰아치던 살풍도 숨지려니

노고대중 위하는 저 싸움터에

이 몸이 진토된 들 한이 없으리

이 시는 후일 중문으로 번역하고 이천(李川)이 곡을 달아 노래로 만들었는데 그 제목은 「유진 최후 일적혈(流尽最後一滴血)」이다.

묘소

1936년 9월 3일 통화현성 서문 밖에서 처형되었는데, 묘소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상지시 조선 민족사 편집 위원회, 『상지시 조선 민족사』민족 출판사, 2009
  • 서명훈, 『하얼빈시 조선 민족 백년 사화』,(민족 출판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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