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청천

한자 池靑天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별
출생 시기/일시 1898년
수학 시기/일시 1913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0월
활동 시기/일시 1921년 6월
활동 시기/일시 1925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7월
활동 시기/일시 1933년
활동 시기/일시 1940년 9월 17일
몰년 시기/일시 1957년 1월 15일
출생지 서울
학교|수학지 일본동경
활동지 만주·관내 지역
정의

일제 강점기 중국만주·관내 지역에서 활동한 군인 출신 독립운동가.

가계

1888년 2월 15일 한성부 북부 진장방 삼청동계(현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의 중인 가문에서 아버지 지재선(池在善, ?~1892.9.5)과 어머니 경주 이씨(?~1916.1.5) 사이에서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5살이 되던 1892년 아버지를 여의고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활동 사항

지청천은 1898년 무관 학교에 입교, 2학년 때 1, 2년생 40여 명과 함께 정부 유학생으로 동경 육군 중앙 유년 학교(東京陸軍中央幼年學校)에 들어갔다. 1913년 제26기생으로 졸업, 중위가 되면서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지도하기 위해 일본의 병서와 군용 지도를 가지고 신흥 무관 학교를 찾았다. 이곳에서 독립군 간부 양성에 진력하고 1920년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의 간부가 되었다.

지청천은 일제가 1920년 10월 간도 참변을 자행하자 서로 군정서를 이끌고 간도성(間島省) 안도현(安圖縣) 밀림으로 이동,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과 대한 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군단의 여단장이 되었다.

1921년 6월 지청천은 흑하 사변(黑河事變) 당시 소련군 포로가 되었으나,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으며, 만주로 돌아왔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그는 고려 혁명군 대표로 이 회의에 참가하였하였다, 1925년 지청천양기탁(梁起鐸)·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대한 통군부를 개편하여 정의부를 조직,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이 되었고, 1925년에는 남·북 만주의 두 단체를 통합하여 국민부를 만들었다. 1930년 1월 김좌진이 저격당한 뒤, 그해 7월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 군사 위원장이 되었으며, 별도로 한국 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이 되었다.

1932년 지청천은 중동 철도 연선과 동빈현 등에서 일본군의 부대와 일전을 치렀으며, 아성현(阿城縣) 전투, 쌍성현(雙城縣) 전투, 대전자(大甸子) 전투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일제가 1932년 만주국을 세우게 되면서 만주에서의 무장 항일 투쟁이 어렵게 되자, 지청천은 1933년 수십 년간 항전하던 만주를 뒤로 하고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중국관내로 들어갔다.

1933년 10월 지청천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명령으로 하남성(河南省)에서 중국 군관 학교 낙양 분교(洛陽分校)에 한인 특별반을 창설하고 총책임자로 취임하여 교성 대장에 이범석(李範奭), 교관에 오광선(吳光善)·조경한(趙擎韓) 등을 임명하고 상해·남경·천진·만주 등지에서 애국 청년 90여 명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1934년 지청천은 남경에서 대일 전선 통일 동맹을 결성하였으며, 다음해에는 민족 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군사국 위원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38년에는 장사(長沙)에서 임시 정부 군무부의 군사학 편수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조성환(曺成煥)을 주임 위원으로 유동열(柳東說)·현익철(玄益哲)·이복원(李復源)·김학규(金學奎) 등과 같이 군사학을 정리, 편수하였다.

또한, 1939년 10월 지청천은 사천성(四川省) 기강에서 열린 의정원 정기 의회에서 의정원 의원 및 국무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11월 지청천은 국무회의에서 군무장(軍務長)으로 선임되어 입법·행정·군사에 대한 제반 사항을 처리하는 중책을 맡았다. 이때 광복군 창설을 목표로 조성환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 특파단을 조직하여 서안으로 파견하여 활동케 하였으며 다음해 2월에는 군무부에서 종래 경영하던 군사학 편수 사업을 계속 발전시켰다.

1940년 9월 17일 지청천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자, 사령관이 되어 1945년 환국할 때까지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1945년 환국 후 26개 청년 단체를 통합한 대동 청년단(大同靑年團)을 창설하여 단장이 되었다.

지청천은 제헌 국회 의원과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 의원, 민주 국민당의 최고 위원을 지냈다. 1957년 1월 15일 서울시 성동구 신당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묘소

1957년 1월 15일 별세한 뒤 서울시 강북구 북한산 자락에 묻혔다가 1994년 4월 14일 국립 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지청천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기려수필』(탐구당, 1971)
  • 지복영,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문학과 지성사, 1995)
  • 이현주, 『(한국광복군 총사령)지청천』(역사공간, 2010)
  • 한시준, 「이청천과 한국광복군」(『한국근현대사연구』 56, 한국근현대사학회, 2011)
  • 황민호, 「백산 지청천의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군사연구』 138, 육군군사연구소, 2014)
관련항목
관련 웹사이트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