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화

한자 李周和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조선일보 용정지국|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총국|동만구역국 집행위원
출생 시기/일시 1899년
활동 시기/일시 1921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몰년 시기/일시 1928년 12월
출생지 함경남도 단천
거주|이주지 길림성 훈춘
학교|수학지 동경
활동지 길림성 용정
활동지 길림성(吉林省) 영안현(寧安縣)
정의

1930년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주화(李周和)는 함경남도 단천 출생으로 어려서 길림성 훈춘으로 이주했다. 국내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와세다 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재학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북간도로 돌아왔다.

1920년 무렵 이주화는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운동을 전개했는데, 1921년 4월 용정의 동흥 중학(東興中學) 건립을 도왔다. 이즈음 조선 일보 용정 지국을 경영하면서 대성 중학, 동흥 중학 학생을 대상으로 광명회, 독서회, 사회과학 연구회를 결성하고 맑스레닌주의 보급에 힘썼다. 1926년 1월 동만 청년 총연맹 창립에 가담하였고 2월 간도 여자 청년회 결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5월에는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의 결성과 함께 조직된 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은 이주화를 비롯하여 김동명(金東明)·김해일(金海一)·강우(姜宇)·홍원석(洪源錫)·한진(韓震)·전승우(田承雨)·최동욱(崔東旭)·김훈(金勳)으로 구성된 9인이 총국 위원이었으며, 김동명이 초대 책임 비서를 맡았다. 만주 일대를 동만도·북만도·남만 제1도, 남만 제2도로 나누어 사업을 전개했으며, 주요 사업은 조직과 선전·교양 활동으로서, 노농청년·여성·소년에 대한 조직 및 교육에 주력했다. 농촌 야학·여자 야학을 설치하고, 방학 중 학생 강연대나 여자 강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주화는 동만구역국 집행위원을 맡아 활동을 전개했다.

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 역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과 마찬가지로 화요파·ML파·서울 상해파 간의 파벌 대립이 심했으며, 1927년 10월의 ‘제1차 간도 공산당 사건’ 이후 각파 분립 상태로 있다가, 코민테른 「12월 테제」의 발표 후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과 함께 해체되었다. 이주화도 이 당시 검거되어 1928년 12월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30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참고문헌
  • 김준엽 외, 『한국공산 주의 운동사』(청계연구소, 1989)
  • 강만길·성대경편,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 한국사사전편찬회 엮음, 『한국근현대사사전』(가람기획, 2005)
  • 상지시 조선민족사 편집위원회, 『상지시 조선민족사』민족출판사, 2009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