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柳東悅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흑룡강성 하얼빈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별 | 남 |
|---|---|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3월 |
| 수학 시기/일시 | 1894년 |
| 수학 시기/일시 | 190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10월 |
| 출생지 | 평북 박천 |
| 학교|수학지 | 일본 |
| 일본 |
일제 강점기 만주·관내 지역에서 활동한 군인 출신 독립운동가.
류동열은 1894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세이쇼 학교[成城學校]를 거쳐, 1903년 일본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일본 근위 사단에서 실무를 쌓았다.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한 제국 파견 무관 자격으로 일본군에 종군하여 선천 부근에서 러시아군과 싸웠다.
류동열은 서울에 있던 조선 주둔 일본군 6군 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대한 제국군에 복귀하였다. 류동열은 대한 제국군 무관 학교와 유년 학교 교관, 1905년 군무국에 전속되고, 그 뒤 참령(參領)으로 승진하여 시위대 기병 대장과 참모국 제2과장을 역임하였다.
류동열은 대한 제국군 육군 참령으로 1906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安昌浩)와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1907년 4월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항일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류동열은 1909년 일제의 침탈을 결사 반대하는 격문을 띄우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던 중 안창호 등이 주최하던 중국에서의 청도 회담에 참석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에 무력 항거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제 관헌에게 피체되었다.
류동열은 1911년 8월 일제가 조작한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경성 지방 법원에서 10년형을 받고, 1913년 3월 20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무죄가 되었으나 1년 6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13년 출옥 후, 류동열은 만주로 망명하여 북간도 길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에 길림(吉林)에서 「대한 독립 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선포하였을 때, 안창호·김좌진(金佐鎭)·이승만(李承晩)·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39인 중 1인으로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류동열은 1919년 4월 13도 대표가 모여 조직한 한성 임시 정부(漢城臨時政府)의 참모부 총장, 노령대한 국민회의 정부(大韓國民會議政府)의 참모 총장에 각각 선임되었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군사직을 맡아서 광복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류동열은 1919년 7월 동삼성 독립운동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길림으로 파견되었으며, 대한민국길림 주재 군정사독판(軍政司督辦)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과 항일 무장 투쟁을 지휘하였다.
류동열은 1922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무총장에 임명되어 1924년 4월까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26년 4월 길림에서 각계의 혁신과 인사들이 모여 고려 혁명당을 조직하였으며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3월 민족 혁명가들이 길림의 국민부 사무소에 모여 유일당인 조선 혁명당을 결성하자 중앙 위원에 선출되었다.
류동열은 1931년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임시 정부에 귀환하여, 1932년 10월 한국 대일 전선 통일 동맹을 조직하였으며, 1932년 12월에는 국무원에 임명되었다. 1932년부터 1935년, 1939년부터 1940년, 1943년 3월부터 1944년 4월 등 수차에 걸쳐 임시 정부 국무 위원(참모장)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류동열은 1935년 중국남경에서 김규식·지청천·신익희 등과 민족 혁명당을 조직하여 독립 투쟁 전선을 통합하고 독립운동에 전력하였다. 1938년 5월 한국 국민당·조선 혁명당·한국 독립당의 3당 통합 운동을 추진하여, 1940년 5월 기강에서 조직한 한국 독립당의 중앙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류동열은 1945년 2월에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여 홍진(洪震)과 함께 당을 이끌어 조국 광복을 대비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건국 활동에 전념하다가 6·25 전쟁 당시 월북되었다.
류동열은 1989년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