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南慈賢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흑룡강성 하얼빈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별 | 여 |
|---|---|
| 출생 시기/일시 | 1872년 12월 7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 몰년 시기/일시 | 1933년 8월 22일 |
| 출생지 | 경북 안동군 일직면 일직동 |
| 활동지 | 아성현·하얼빈 시 |
| 묘소 | 하얼빈남강러시아 공동 묘지 서쪽에 있는 한인묘지 |
일제 강점기 서로 군정서 등에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은 영남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南珽漢)의 3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19세에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 사는 의성 김씨(義成金氏)김영주(金永周)에게 출가하였다.
남자현은 19살에 출가하여 남편 김영주가 의병으로 나가 싸우다가 희생되자 3대 독자인 유복자를 키우고 시부모를 부양하였다. 남자현은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한 후 만주로 망명하였고, 서로 군정서에 참가하여 활약한 유일한 여자 대원으로 기록됐다.
남자현은 각 독립운동 단체와 군사 기관, 농촌을 다니면서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동시에 동만주 일대 10개 처에 여자 교육회를 조직하여 여성 계몽과 해방 운동에 진력을 다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하였는데, 부대에서 부상병을 돌보는 활동을 전개하여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렸다.
남자현은 1925년 이청산 등과 일본 총독 사이토[齋藤]를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서울에 잠입했으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8년 길림에서 김동삼·안창호 등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경찰에 잡히자 지성으로 옥바라지 하였으며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남자현은 1929년 북만으로 이동하여 아성현 취원창을 거점으로 항일 투쟁을 계속 전개하였다. 1931년 10월 독립운동 지도자인 김동삼이 체포되어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 지하 감옥에 투옥되자 옥바라지와 연락을 맡아 다녔다.
리튼 조사단이 왔을 때는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한국 독립 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1933년 봄 남자현은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 대회를 맞아 만주국일본 전권 대사 다케 후지신기[武藤信義]를 격살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녀는 권총과 폭탄을 운반하다가 하얼빈시 도외 정양가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남자현은 60세가 넘은 나이에 일본 총영사관 지하 감옥에 구금되어 여섯 달 동안 고문을 당하였다. 그 와중에 단식 투쟁도 벌인 그녀는 15일 만에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몸으로 풀려났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 순국하였다.
남자현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