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爀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흑룡강성 하얼빈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별 | 남 |
|---|---|
| 출생 시기/일시 | 1875년 |
| 수학 시기/일시 | 1892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 몰년 시기/일시 | 1936년 |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 출생지 | 경기 용인 |
중국만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군인 출신 독립운동가.
김혁은 1892년 3월 한말 연성 무관 학교에 입학하여 3년 동안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1897년 4월에 무관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육군 보병 참위로 임관되었으며, 그 뒤 육군 참령(陸軍參領)으로 승진하였다. 1907년 8월 한국군이 해산을 당하자 일제와 싸울 것을 결심하고 고향인 용인에 돌아가서 청년들을 규합하여 항일 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운동에 가담한 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봉천성(奉天省) 무송현(撫松縣)으로 망명하였다. 같은 해 8월 김호(金虎) 등과 함께 수백 명의 애국 청년들을 모아 흥업단(興業團)을 조직, 단장에 김호를 추대하고 자신은 부단장으로서 항일 투쟁에 전력하였다. 1920년 9월경에는 봉천성 안도현(安圖縣) 삼인방(三人坊)에서 홍범도(洪範圖)·지청천(池靑天) 등 수백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고 부단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김혁은 청산리 전투를 겪은 다음 1921년 1월에 영안현(寧安縣)밀산(密山)에서 서일(徐一)·홍범도·지청천·김좌진(金佐鎭) 등과 합세하여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의용군·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대한 독립단·광복단 등 만주의 10개 독립군 단체를 통합, 대한 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였다. 이때 군사부장에 선임되어 노령(露領)에서 항전하다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을 겪었다.
1925년 3월 15일 김혁은 영안에서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중앙 위원회를 열어 중앙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신민부가 목릉현(穆綾縣) 추풍(秋風)에 성동 사관 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자, 교장을 겸임하여 500여 명의 사관생을 양성하여 독립운동 요원을 안정적으로 배출하였다.
1927년 2월 중동선(中東線)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신민부 총회 개최 중 일본과 만주 경찰 합동 수색대의 기습을 받고 항전하다, 박경순(朴敬淳)·유정근(兪政根)·이춘섭(李春燮) 등 1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
하얼빈 일본 영사관 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이듬해 3월 20일 신의주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 해 4월 4일 신의주 지방 법원 검사국으로 송치, 최종 판결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그 뒤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되었다가 1936년 8월 25일 가출옥하였으나 혹형으로 고향 용인에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