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澤明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흑룡강성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용진학회|조선청년전위동맹|조선청년연합회|조선의용대|조선독립동맹|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공작 위원회 |
| 출생 시기/일시 | 1915년 |
| 수학 시기/일시 | 1935년 |
| 수학 시기/일시 | 1937년 |
| 수학 시기/일시 | 1939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7월 14일4 |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5월 5일 |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51년 |
| 몰년 시기/일시 | 1998년 |
| 출생지 | 부산 동래 |
| 거주|이주지 | 심양시 공태향 |
| 학교|수학지 | 심양시 |
| 학교|수학지 | 광동성 광주시 |
| 학교|수학지 | 강소성 남경시 |
| 학교|수학지 | 섬서성 연안 |
| 활동지 | 광동성 광주시 |
| 활동지 | 호북성 무한시 |
| 활동지 | 산서성 태항산 |
| 활동지 | 흑룡강성 파헌현 |
| 활동지 | 흑룡강성 하얼빈시 |
| 활동지 | 개성 |
일제 강점기 섬서성 연안 등 화북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김택명(金澤明)은 1915년 부산 동래 출신으로 부친을 따라 만주로 와서 선양(瀋陽) 교구 공태향이라는 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성장했다. 심양 동광 중학교를 졸업하고 북경, 남경, 상해 등지를 거쳐 1935년 광주(廣州)의 중산 대학(中山大學)에 들어가 공부를 하면서 ‘용진 학회(勇進學會)’라는 혁명 조직에 참가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937년 12월에 김택명은 남경에 있는 중국 중앙 육군 군관 학교 성자(星子) 강릉 분교(江陵分校)에 입학하여 1938년 5월에 졸업하였다. 1938년 10월에는 무한에서 조선 청년 전위 동맹에 가입하여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1939년 5월에는 연안 항일 군정 대학(抗日軍政大學) 제5기생으로 입학하여 수학한 후 조선 의용대를 이끌었다. 1940년 초에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김택명은 1940년 화북중조산(中條山)에서 항일 선전활동을 전개하다가 낙양으로 철수하였다. 1941년 1월 1일에 성립된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와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에 참가하였다. 이후 김택명은 1942년 7월 14일에 건립된 화북 조선 독립 동맹에 참가하여 호일화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9월 중국 공산당의 지시로 활동무대를 다시 만주로 옮겨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김한규’라는 인물로 가장하여 활동하였다. 조경형, 원용주, 김용덕, 한탁주 등 10여 명을 맹원으로 받아들이고 1943년 하얼빈 인근 파언현(巴彦縣) 동성구에 잠입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5월 5일 조선 독립 동맹 제12지부[조선 독립 동맹 북만지구 특별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또한 1943년 10월에 김택명은 하얼빈 인근에서 활동하던 정경호, 수화현의 현용조 등과 하얼빈에서 회의를 열고 조선 독립 동맹 북만 특별공작 위원회[북만 특위]를 건설하였다. 이후 정경호는 하얼빈시, 삼과수, 호란 등지를 책임지고 조직을 발전시켰으며, 김용진은 수화, 상지, 연수현을 두루 다니며 맹원을 흡수하여 독립 동맹 지부를 건립하는 등 활동하였다.
김택명은 이러한 활동 사항을 북경의 조선 독립 동맹 총부에 5차례 보고하였다. 1945년 5월 조선 의용군 총사령 무정이 주덕 총사령과 중국 공산당 중앙 해외사업위원회에 보낸 보고서에는 “작년 12월 27일 비밀리에 전해온 보고에 의하면 우리 조직은 하얼빈 인근에서 비교적 큰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4월 23일 보고에 의하면 적이 할빈에 꾸린 청년 훈련소에 2,000여 명의 조선 청년이 있는데 거기에 이미 우리 동맹의 지하 소조가 건립되었다”고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김택명의 활동이 자세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김택명은 청년들에 대한 선전 사업을 중시하였다. 동성 농장에서는 농민 강습소를 꾸려 청년 활동의 진지로 삼고, 협화 청년단을 동맹의 선전 도구로 이용하였다. 맹원 원용주를 강습소 부소장으로, 한탁주를 청년단 부단장으로 들여보내 사상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그는 ‘쏘독 전쟁과 국제 정세’란 격문을 등사하여 맹원에게 배포하여 정치적 각성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를 토대로 맹원들을 연안과 조선에 파견하여 일제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하기도 했다.
1944년 가을부터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김택명은 하얼빈에서 은밀히 활동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정세를 파악하여 맹원들에게 알려줌으로서 일제의 패망에 대비하여 대대적인 활동을 개시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삐라가 파언현 당안관에 남아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백만의 생명을 잔혹하게 학살하며 전쟁을 일삼는 흉악한 마귀 일본 제국주의는 지금 붕괴되어가고 있다. 때는 왔다. 그 독사의 유린을 당하고 있는 민족들은 다 같이 궐기하라! 광명은 우리의 앞길을 비춰주고 있다!
피압박 민족은 단결하자! 제국주의를 철저히 타도하자! 중국은 중화민족의 중국이다! 조선민족 해방 만세!
김택명은 해방 이후 하얼빈에 체류하면서 9월 25일 하얼빈 보안 총대 조선 독립 대대를 창립하고 대대장을 맡아 재만 한인을 보호하였다. 1946년 북한으로 옮긴 이후에는 본명이 이상조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6·25 전쟁 휴전회담 당시 조선 인민군 수석 대표를 지내는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1957년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1998년 러시아민스크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