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成白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흑룡강성 하얼빈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한민회 회장|동흥 학교|대한 국민회 만주리아 총회 회장 |
| 출생 시기/일시 | 187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7월 27일 |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4월 |
| 출생지 | 함경북도 종성 |
| 거주|이주지 | 연해주 우수리스크 |
| 활동지 | 하얼빈시 |
| 활동지 | 하얼빈시 |
| 활동지 | 하얼빈시 |
일제 강점기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성백은 함경북도 경성 출신으로 1880년 3살 때 부모를 따라 연해주 우수리스크로 이주하였다. 러시아에 귀화한 뒤 러시아 이름은 치온 이와노위츄 킴이다.
김성백은 1898년부터 러시아의 동청철도(東淸鐵道) 건설에 참여하면서 연해주에서 하얼빈으로 이주하였다. 김성백은 러시아 동방정교를 믿어 정식 세례를 받는 등 현지 정착하였다. 이후 철도공사 청부업, 통역 등을 하면서 상당한 재력을 갖게 되어 하얼빈 한인 사회의 유력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부두구 레스나야가 28호[지금의 도리구 삼린가 34호]에 거주하였는데, 연해주로 오는 한인들 거처와 직업을 마련해 주는가 하면 한인 교육 문제를 해결하고자 동흥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상습 침수 구역에 있던 한인 임시 묘역을 이전하여 한인 사회의 결속력 강화에 힘썼다. 이를 통해 그는 한민회가 유지되도록 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09년 7월 27일 하얼빈시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이 민족의 생존과 발전에 부딪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09년 8월 공립협회 하얼빈지방회에 가입하였고, 이를 국민회 하얼빈지방회로 개편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당시 하얼빈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은 대략 70여 명 정도였다.
1909년 10월 22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에 건너온 안중근·우덕순·유동하에게 10월 26일 거사 직전까지 숙박을 제공하였다. 또한 그는 동흥 학교 교사로 있던 김형재, 탁공규를 소개해 주는 등 도움을 주었다. 김형재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26일에 도착한다는 보도가 실린 중문 신문을 안중근에게 제공하여 안중근이 하얼빈 도착 시간을 정확히 알고 의거를 수행하는 데 일조했다.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저격한 뒤, 그는 가담 혐의로 붙잡혀 11시간 동안 심문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안중근 처와 아들들을 자신 집에 머물게 하였고 요동 반도 여순에서 안중근이 재판을 받을 때 의연금을 모집하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우덕순은 회고록에서 “우리와 같이 한국의 완전 독립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지사”라고 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김성백의 집은 “언제나 사람이 모여드는 집”이라고 불릴 만큼 하얼빈 지역 한인 사회에서 그의 영향력은 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김성백은 비밀 항일 지하 조직인 ‘대한 국민회 만주리아 총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만주리아 총회는 하얼빈시, 석두하자, 횡도하자, 목릉, 하이랄, 삼성[지금의 의란 등 지방 분회를 관할하였다.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이 일본 외무 대신에 보낸 보고서에 “한민회는 경상적으로 반일 사상을 선동하는 중심이다”라고 보고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김성백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러시아와 동맹관계를 맺게 된 일본은 러시아 당국에 김성백의 추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에 1916년 9월 그는 이르쿠츠크로 추방되었다. 이후 잠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주하였다가 이르쿠츠크에 정착하여 이르쿠츠크 조선인민회 찬성원(贊成員)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월 이르쿠츠크 한인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30만여 루블을 보낼 때 10만 루블을 보탰다. 그해 4월 시베리아 치타(知多)에 극동공화국이 세워지자 극동공화국 정부 한인부에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