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기동

한자 柳基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흥업단|서로 군정서
출생 시기/일시 1891년
활동 시기/일시 1917년
활동 시기/일시 1922년
활동 시기/일시 1924년 1월
활동 시기/일시 1924년 3월
몰년 시기/일시 1924년 4월 7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년 4월 16일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군 입동면
거주|이주지 하얼빈시 아성현 취원창
활동지 봉천성(奉天省) 무송현(撫松縣)
활동지 길림성 화전현
활동지 하얼빈
정의

일제 강점기 하얼빈 지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류기동은 1917년에 만주로 망명한 이후, 1920년 봉천성 무송현(撫松縣)에서 조직된 흥업단(興業團)에 가담하여 항일 무장 활동을 하였다. 류기동은 1922년 길림성 화전현서로 군정서의 헌병으로 활동하다가, 1924년 1월초 가족과 친지 등 10여 세대를 이끌고 하얼빈에서 70리 떨어진 북만주 취원창에 이주하였다.

1924년 3월 초, 류기동은 하얼빈에 잠입, 활동하는 가운데 서로 군정서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만수(金萬秀)와 만났다. 이때, 그로부터 대련에서 파견된 구니요시 세이호[國吉精保]가 지휘하는 특별 형사반이 북로 군정서 독립군 2명을 체포했다는 첩보를 접하였다. 이후 그들은 이들를 급습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일본 경찰에 탄로났다. 1924년 4월 7일 저녁 11시, 일본과 중국 경찰대가 그들이 머물고 있던 하얼빈시 도외구 18도가신기 여관을 포위하였다. 여러 차례의 항복 권유에도 류기동은 응하지 않고, 김만수, 최병호와 함께 총격전을 벌여 특별 형사반장 구니요시 세이호 등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류기동김만수, 최병호와 함께 33세의 나이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조선 일보』는 1924년 4월 16일자에 「독립당원 할빈에서 비장한 최후를 고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하였으며, 하얼빈 지역에서 발행되는 중국 신문인 『빈강 시보』도 이를 보도하여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묘소

류기동의 묘는 중국인 묘지에 가매장 하였다가 하얼빈 조선인회와 각계 한인 유지인사들이 남강극락사 동쪽에 있는 한인 공동 묘지에 이장하였다. 하지만 류기동의 묘소는 하얼빈시 도시계획에 의해 한인 공동 묘지를 황산 공동 묘지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유실되고 말았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 5·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1976)
  • 김후경·신재홍,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한국민족운동연구소, 197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91)
  • 서명훈, 『할빈시 조선민족 백년사화』(민족출판사, 2007)
  • 독립유공자공훈록(국가보훈처, http://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901&ipp=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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