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萬秀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흑룡강성 하얼빈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서로 군정서|참의부 |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4월 |
| 몰년 시기/일시 | 1924년 4월 7일 |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4년 4월 16일 |
| 출생지 | 경상북도 안동군 풍산면 |
| 활동지 |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 |
| 활동지 | 하얼빈 |
중국하얼빈시 일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만수는 1892년 12월 25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북면(豊北面) 오미동[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김낙운(金洛雲)과 분성 이씨(盆城李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4년 11월 15일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자(字)는 회일(會一)이다.
김만수는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김지섭(金祉燮)·김재봉(金在鳳)·김응섭(金應燮) 등과 같이 항일 투쟁을 결의하고 1913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8년 봄 이상룡(李相龍)이 길림성 화전현(樺甸縣)에 둔전(屯田) 형태의 길남장(吉南庄)을 설치하고 20세 이상의 장정들을 모집하자 이에 선뜻 응하였다.
1922년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 안에 헌병대가 조직되자 대원이 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23년 헌병대원으로 들어온 최병호(崔炳鎬)와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그 무렵 대련에서 파견된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의 고등정탐부장 구니요시 세이호[國吉精保]가 이끌던 일본 특별 형사반이 북로 군정서 소속 독립군 2명을 체포했다는 첩보를 접하였다. 그는 최병호(崔炳鎬) 등과 함께 일본 하얼빈 총영사관을 습격하여 구니요시 세이호 등을 암살하기로 결의하고, 동지 10여 명을 모아 건국청년모험단(建國靑年冒險團)을 결성하였다. 1923년 12월 초 하얼빈으로 건너가 시 외곽 남십팔도가(南十八道街)의 중국인 집에 임시거처를 마련하고 기회를 엿보았다. 1924년 4월 초 우연히 길남장 시절 친구 류기동을 만난 뒤에 동지로 합류시켰다.
그런데 그러한 거사 계획이 사전에 탄로 나는 바람에 1924년 4월 7일 저녁 11시 구니요시 세이호의 부하들에 의해 머물고 있던 하얼빈시 도외구 18도가신기 여관이 포위되었다. 김만수는 항복 권유를 거부하고 류기동, 최병호와 함께 총격전을 벌여 특별 형사반장 구니요시 세이호 등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은 뒤로 물러나고 일본 하얼빈 총영사가 1인당 300원의 현상금을 내걸자, 중국 군경이 앞장서 수백 발의 총탄을 난사하였다. 이에 맞서 김만수 등은 권총으로 응사하였다. 다음 날 4월 8일 오후 1시경, 중국 경찰이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부수고 구멍을 내어 5~6개의 폭탄을 던지는가 하면 총탄을 퍼부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동료들과 함께 5분 정도 총격전을 벌였지만, 탄환이 떨어지자, 가슴에 총을 쏘아 자결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 일보』 1924년 4월 16일자 신문에 「독립당원 할빈에서 비장한 최후를 고함」이란 제목으로 그 경과가 보도되었으며, 중국 신문 『빈강 시보(濱江時報)』에도 보도되어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2007년 그의 출생지인 안동시에서 추모 행사가 개최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