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吳應龍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요하 반일유격대|동북 항일 연군제7군 제2사 4단 2련 연장 |
| 출생 시기/일시 | 191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6년 1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9년 |
| 몰년 시기/일시 | 1939년 |
| 출생지 | 무원현 태평진 다반촌 |
| 활동지 | 무원현 일대 |
| 활동지 | 동만주 일대 |
| 활동지 | 동만주 요하 무원구간 |
오응룡은 평안북도 희천(熙川) 출신으로 1917년에 태어나 15살 때부터 정찰 활동과 연락 사업을 전개하였다. 1921년 그의 가족은 만주 흑룡강성 요하현으로 이주하였다. 1933년 8월 이학복이 지휘하는 요하 반일 유격대에 입대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시작하였다. 입대 초기 소재허 보위단 습격 당시 적 내부에 잠입하여 토성문을 열었는데, 이를 계기로 보위단을 점령하고 총 30자루, 탄알 3천여 발, 말 25필을 노획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이 승리를 토대로 요하 유격대의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다.
1936년 11월 동북 항일 연군 제7군 제2사 4단 2련 연장에 임명되었고, 1937년 1월초 시린자 집단 부락 전투 및 운두허즈 전투에서 적 장교를 사살하는 등 큰 전공을 올렸다.
1938년 고향인 흑룡강성 가목사(佳木斯) 인근에 위치한 무원현 다반촌 지역에서 식량 확보를 위해 활동하던 중 적탄에 부상을 입어 후방으로 후송되기도 했다. 이때 오응룡은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부대원들을 독려하여 적군을 물리치고 식량을 온전히 확보할 수 있었다.
1939년 동북 항일 연군 제7군 경위련 연장에 임명되었고, 소속 부대인 제7군이 요하 십팔쌍지 밀영에 주둔하고 있을 때, 소속 부하 최민철, 김광산 등 4명과 함께 식량과 약품 조달 임무를 맡아 요하·무원 을 일주일에 한 번씩 오가던 연락원과 접선하여 물자를 가지고 부대로 복귀하던 중, 요하 4도구 지점에서 적군의 습격을 받았다. 오응룡은 발목에 중상을 입자 확보한 물자와 부대원들을 먼저 피신시킨 후 수류탄을 안고 산화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23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