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재

한자 金衡在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대동공보 기자|동흥학교 교원|안중근의거에 가담
활동 시기/일시 1908년
활동 시기/일시 1909년 1월
활동 시기/일시 1909년 4월
활동 시기/일시 1909년 7월
활동 시기/일시 1909년 12월
활동지 하얼빈
활동지 하얼빈
활동지 하얼빈
정의

연해주 한인 사회의 정착과 안정을 위해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형재는 1908년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교민단체 한국 국민회가 발행하는 『대동 공보(大東共報)』의 통신원으로 처음 하얼빈에 온 이후 신문 보급 및 기자 활동을 전개했다. 1909년 1월 김성백과 협력하여 공립회를 조직하고, 학교 설립을 계획했다. 1909년 4월 김성백이 거금을 출자하여 하얼빈 부두구 외국3도가 47호에 동흥 학교를 건립하였다.

김형재는 한문 교원을 맡아 학교에 숙식하면서 월급도 받지 않고 항일 민족 교육에 힘썼다. 또한 김형재는 러시아어와 중국어에 능통하여 『대동 공보』의 기사를 번역, 이를 중국 신문인 『원동보(遠東報)』와 러시아 신문에 공급하였다. 1909년 7월 김형재김성백을 도와 하얼빈에 한민회를 조직하고 동흥 학교에 자금을 지원하였다.

김형재는 『대동 공보』 기자 이강(李剛)으로부터 1909년 10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듣고는 또 다른 행동대원 조도선(曺道先)을 의거에 합류시키는 등 이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는 10월 23일 안중근 일행과 함께 하얼빈 한인 사회 유력자인 김성옥(金成玉)의 집에 가서 이강의 친서를 보여주고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하였다. 김형재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10월 26일에 도착한다는 보도가 실린 중문 신문을 안중근에게 제공하여, 그가 의거를 수행하는 데 일조했다

김형재안중근 의거 이후 사건에 연루되어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여순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1909년 12월 24일 석방되어 호송 열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돌아오던 중에 장춘에서 도망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 독립운동사(韓國 獨立 運動史)』1권 (국사 편찬 위원회, 1965)
  • 『한국 독립운동사 자료(韓國 獨立 運動 史資料)』6권, 7권 (국사 편찬 위원회, 1976~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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