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韓別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조선 공산당 만주총국 동만도 조직부장|중국 공산당 연화중심현위 선전부장|5·30폭동 주도 |
| 출생 시기/일시 | 190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1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8월 |
| 몰년 시기/일시 | 1933년 |
| 출생지 | 평안북도 강계 |
| 거주|이주지 |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 |
| 활동지 | 길림성 연길현 |
| 활동지 | 길림성 연길현 |
| 활동지 | 삼도구, 연길, 왕청 |
| 몰년 시기/일시 | 경성 |
일제 강점기 길림성화룡현을 중심으로 활동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한별은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난 뒤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로 이주했다. 한성(韓星), 박일천, 김일묵(金一黙)이라고도 불렸다.
한별은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으며, 1920년에 소련으로 망명하여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6년 연변으로 파견되었고 1927년 5월 조선 공산당에 입당하여 동만도 제9 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10월에는 ‘제1차 간도 공산당 검거 사건’을 피해 북만 지역으로 이동했다. 11월 영안현(寧安縣) 동경성에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화요파) 재결성에 참여하였고, 고려 공산 청년회 선전부장을 맡았다. 1929년 11월에는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 동만도 조직부장을 지냈다.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에서는 1930년 1월에 ‘3·1 운동’ 11주년을 계기로 농민, 학생과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대규모적인 민중 시위 운동을 계획하렸는데, 선전부장 장주련(장시우)을 연변 지구에 파견했다. 한별 역시은 계획에 따라 각지의 민중들을 조직 동원하는 한편 시위하는 당일에 뿌릴 선전 전단과 수기 등을 제작했다. 군중 선동에 사용할 전문은 장시우와 윤복송(尹福松)이 기안한 것을 선전부장 강시준의 책임 아래 약 30만장을 인쇄하였는데 장시우, 강석준(姜錫俊), 윤복송, 한별 등이 이를 주도하였다. 또한 이들은 2월 동만 각지에 전문을 배포하는 한편 국자가와 왕청 지역에서 직접 구두를 통하여 민중을 선동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이날 시위에 동원된 군중의 수가 많고 그 기세가 거센 것을 보고 그보다 규모가 큰 민중 운동을 계획하였다. 우선 민중 혁명 단체를 동원하여 무기와 자금을 장만하고 5월 1일에 대규모 시위를 궐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은 3월 하순 일제 간도 일본 총영사관에게 포착되어 관련자들이 검거되기 시작, 5월 중순까지 13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것이 바로 ‘제3차 간도 공산당 사건’이다.
한별은 1930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삼도구(三道溝), 연길, 왕청에서 지부 조직 사업에 종사했다. 그해 8월에는 중국 공산당 연화 중심 현위원회(延和中心縣委員會) 선전부장이 되었다. 11월에는 러시아 10월 혁명 13주년에 즈음하여 ‘5·30 폭동’, ‘추수 투쟁’에 앞장서서 투쟁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압송되었다. 1933년 5월 복역 중 고문으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