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암동 학살 사건

한자 獐岩洞 虐殺 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용정촌 장암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일제의 한인 학살 장소
관련인물/단체 대강융구(일본군)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0년 10월
정의

1920년 10월 길림성 용정촌 장암동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한인 학살 사건.

역사적 배경

1920년 6월 봉오동(鳳梧洞)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대패한 일본군은 보복 차원에서 서·북간도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독립군들을 소탕하고자 간도 지방 불령 선인 초토 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웠다. 계획에 따라 일제는 대병력을 간도에 침입시켜 수많은 한인을 학살함은 물론 학교·교회·가옥 등을 파괴하는 경신 참변을 일으켰다.

경과

1920년 10월 말 일본군 제14사단 제15연대 제3대 대장 대강융구(大岡隆久) 등 77명은 용정촌에 위치한 한인 마을인 장암동(獐巖洞)을 포위하여 마을 주민 전체를 교회당에 집결시켰다. 이 중 40대 이상의 남자 33명을 포박해 교회에 가둔 뒤 불을 질렀다. 일제에 의해 장암동 학살 사건이 자행된 것이다.

결과

일본 군인들은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한인들을 총검으로 찔러 모두 몰살시켰다. 가족들이 이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냈으나, 5~6일 후 일본군이 다시 마을에 들이닥쳤다. 일본 군인들은 장사지낸 시체를 한 곳에 모아 짚단을 올려놓고 석유를 뿌린 뒤 불을 붙여 뼈만 남을 때까지 완전히 소각하였다. 유골을 분간할 수 없게 된 유가족들은 합장 무덤을 만들었다.

의의와 평가

장암동 학살 사건은 일본군이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패전하자, 이에 앙갚음하기 위해 재만 한인들에게 보복하는 경신 참변을 일으켰다. 이는 일제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참고문헌
  • 윤병석, 『독립군사』(지식 산업사, 1991).
  • 채근식, 『무장 독립운동 비사』(대한 민국 공보처, 1985).
  • 한시준 외4명,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국외 항일 유적지)』 59 (경인 문화사, 2009).
  • 홍선표·황민호,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3·1 운동 직후 무장 투쟁과 외교 활동)』 22(경인 문화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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