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正義團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 단체 |
|---|---|
| 설립 시기/일시 | 1919년 3월 25일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8월 7일 |
1919년 3월 북간도 왕청현(汪淸縣)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1919년 3월, 3·1 운동 직후 서간도·북간도 지역에서는 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 단체들은 70여 개에 달하였다. 정의단[대한 정의단]도 그러한 조직 중에 하나였다. 정의단은 1919년 3월 25일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양현(梁玄) 등의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기존의 중광단(重光團)을 토대로 조직되었다.
하지만 1919년 8월 정의단 내부의 공화주의와 복벽주의 간의 갈등으로 공교도들과 결별하고 말았다. 이후 대종교인들은 정의단을 대한 정의단으로 조직을 재정비한 뒤에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무장 투쟁에 발맞추어 군사 경험을 가진 인사의 영입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로써 1919년 8월 7일 김좌진이 합류하게 되었고 이후 무장력을 갖춘 군정부로 개편되었다.
정의단은 초창기 서일(徐一)을 중심으로 조직된 중광단(重光團)이 효시가 된 단체이다. 중광단은 무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군사 활동보다는 청년들의 항일 민족 의식 고취와 애국 운동 함양 등 정신 교육에 치중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광단은 만주에 흩어져 있던 대종교인들을 규합하였고, 그해 3월 25일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양현(梁玄) 등이 중광단을 정의단[대한 정의단]으로 개편하였다. 당시 서간도·북간도 지역에서는 70여 개에 달하는 독립운동 단체들이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의단은 1919년 8월경 내부의 공화주의(共和主義)와 복벽주의(復辟主義)간에 갈등으로 대종교인과 공교도인으로 분열하였고, 결국 동월 16일 김성국 등 공교도들이 정의단을 이탈하였다.
이후 대종교인들은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무장 투쟁에 발맞추어 군사 경험을 가진 인사의 영입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1919년 8월 7일 김좌진이 합류하게 되었고 이후 정의단은 무장력을 갖춘 군정부로 개편되었다. 그 해 1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시로 대한 군정서(大韓軍政署)[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로 확대·개편되었다.
정의단은 초기에는 무장력을 갖추지 못하였지만, 강령을 만들어 발포하였다. 정의단은 단원들을 모집하는 한편, 국문으로 된 『일민보(一民報)』·『신국보(新國報)』 등의 기관지를 발행하여 독립 사상 고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서일을 단장으로 만주 각지에 5개 분단과 70여 개 지단을 설치하였다.
1919년 7월 정의단은 국내 동포들에게 분발을 촉구하는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창의격문에는 일제의 조선 강점을 규탄하고 한민족은 일제히 궐기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힘을 바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편, 정의단은 보다 효과적인 대일 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7대 약장을 제정·발표하였다.
정의단은 1919년 8월 김좌진의 합류 후 군정부로 개편되면서 본격적으로 무장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연해주에서 많은 무기를 구입하여 전력의 강화에 힘쓰면서 무장 투쟁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정의단은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하여 직접적인 무장 항일 투쟁을 하기는 어려웠으나, 기관지를 발행하여 중국 동북 지역의 한인들에게 항일 독립 투쟁의 필요성과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