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演義會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사회 단체 |
|---|---|
| 최초 설립지 | 길림성 국자가 |
| 현 소재지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구 연길시 |
1900년대 초반 간도에 조직되어 활동하던 한인 단체.
연의회는 간도 거주 한인들 간의 교류 및 교육 보급을 위해 설립되었다.
연의회는 1900년대 초에 설립되었다. 1908년 3월 통회장 김병남(金秉南), 차회장 박만수(朴萬秀), 회장 이광수(李光秀), 평의원 방병기(方炳起)·방동규(方東圭)·황진성(黃鎭成)이 지도부로 있었으며, 약 1,000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화룡현 제하사(霽霞社)·시건평(時建坪) 등지에 회원이 가장 많이 분포하였으며 걸만동(傑滿洞)연동사(沿東社) 등지에도 다수의 회원이 있었다.
연의회는 청나라 변무독판(邊務督辨)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전 간도 관리사 이범윤과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다. 연의회는 강연회 개최, 청원서 제출 등을 통하여 일제의 간도 침입에 조직적으로 대항하였다.
1907년 9월 연의회는 침략 의도를 가진 일본인들을 쫓아내 내환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서와 간도 내 인구 조사표를 작성하여 길림의 청나라 관헌에 전달하였다. 청원서에는 조선을 청나라의 번국(藩國)으로 칭하거나 회원증에 숭정(崇禎) 연호를 사용하였지만, 이범윤과 연락을 취하는 등의 행동을 보면 청나라에 완전히 굴종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연의회는 1908년 1월 서상은·백남수 등을 길림 순무에게 보내 한인 보호를 요청하였다. 같은 해 3월초에는 봉천 총독에게 공자묘 설치를 요구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연의회는 의견서를 보내 일제의 침략 의사를 지적하고 비밀 단체를 조직하여 일진회원과 도사장(道師長)들에게 친일 활동 중지를 경고하기도 하였다. 연의회는 1909년 9월 간도 협약이 체결된 이후에 연길부청과 길림성에 진언하여 간도 협약 파기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연의회는 간도 거주 한인들 간의 교류에 일익을 담당했으며, 일제의 침략 행위에 반발하여 청나라 당국과 협조하며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