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청 항일 유격대

한자 汪清 抗日 遊擊隊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항일 무장 단체
설립자 왕청현 혁명 군사 위원회
설립 시기/일시 1930년 10월
설립 시기/일시 1932년 3월
개칭 시기/일시 1932년 11월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2년 2월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2년 2월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2년 2월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2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2년 10월
최초 설립지 길림성 왕청현 나자구
최초 설립지 길림성 왕청현 소왕청
정의

1930년 10월 길림성왕청현에서 조직된 항일 노농 유격대.

개설

1930년 10월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에서 총인원 30명 규모로 처음 조직되었다. 이후 왕청 항일 유격대는 별동대와 유격 중대 등을 추가하여 규모를 확대해 나갔으며, 1932년 이후에는 만주국 경찰서나 만주군 소부대를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32년 11월 왕청 항일 유격대는 왕청현 항일 유격대대로 개편되었다. 규모는 3개 중대 90여 명까지 증가했다. 1933년 5월 이후로는 별동대도 유격대대로 편입되었다.

설립 목적

왕청 항일 유격대는 왕청현 각지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조직된 비정규 항일 무장 단체이다.

변천

1930년 10월 왕청현 나자구에서 왕청현 혁명 군사 위원회가 정식 창립되면서 왕청현 유격대를 조직하였다. 대장은 박세운(朴世云), 정치 위원 겸 참모장은 한권(韓權)이었으며, 총인원은 30명, 정식 대원은 12명이었다. 1932년 2월, 중국 공산당 당원 이광(李光)은 별동대를 조직하였는데 얼마 뒤 20여 명으로 늘어났다.

1932년 3월, 중공 왕청현 위원회는 무기 탈취를 위해 조직했던 돌격대를 기초로 하여 왕청현 소왕청에서 김철(金哲)을 중대장으로 하는 20명 규모의 왕청현 유격 중대를 조직하였다.

1932년 11월, 왕청 항일 유격대는 왕청현 항일 유격대대로 개편되어 양성룡(梁成龍)이 대대장을, 김명균(金明均)이 정치 위원을 맡았으며, 그 아래 3개 중대를 두었다. 규모는 90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소총과 권총 80여 자루로 무장하였다. 1933년 5월, 이광이 암살당한 후 이광의 별동대도 유격대대로 편입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32년 2월, 이광의 별동대가 1920년대 초 북간도 지역 독립군단이 땅에 묻어둔 소총과 탄약을 파내어 무장하고 왕청현 하마탕의 지주 장원을 습격하여 소총 7자루를 탈취하였다. 그뒤 또다시 왕청현 모란촌(牧丹村)의 만주국 경찰 분주소를 습격하여 소총 6자루를 빼앗았다.

1932년 2월, 중공 왕청현 위원회가 조직한 돌격대가 왕청현 대감자(大坎子)의 만주국 경찰 분주소를 습격하여 소총 7자루를 노획하였다. 1932년 여름, 이광의 별동대와 김철의 유격 중대가 연합하여 석현의 무장 자위단을 습격, 소총 10자루를 노획하였다. 1932년 10월, 별동대 20여 명과 유격 중대 30여 명이 연합하여 마록구(馬鹿溝)에서 만주군 제3려(旅) 맹영(孟營)의 1개 패 30여 명을 매복 기습하여, 소총 13자루와 물자를 노획하였으나 김철이 이 과정에서 전사하였다.

의의와 평가

1930년 10월 조직된 이후 줄곧 조직을 확대해 나가며 조직 규모에 상응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대부분 만주국의 조직을 상대로 전과를 올렸다.

참고문헌
  •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 편 『봉화』,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3, 민족출판사, 1989
  • 최성춘 주필, 『연변 인민 항일 투쟁사』(민족 출판사, 북경, 1999)
  • 주성화 저, 『중국 조선인 이주사』(한국 학술 정보(주),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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