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용성

한자 白龍城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종교/불교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인물/종교인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4년 5월 8일
몰년 시기/일시 1940년 2월 24일
정의

일제 강점기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속명은 백상규(白相奎)이다. 법명은 진종(震鍾)이며, 용성(龍城)은 그의 법호(法號)이다.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전라남도 장흥(長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백남현(白南賢)이다.

활동 사항

백용성은 16세에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수도한 뒤, 전국 사찰을 돌며 심신(心身)을 수련하였다. 1911년 서울 종로 봉익동 3번지에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였다. 이후 1915년 그는 새 불교 운동을 전개하고자 불교의 ‘불(佛)’을 번역하면 ‘대각(大覺)’이라며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하여 우리나라 불교도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다. 대각교 본부는 대각사에 두었다.

1919년 2월 27일 한용운(韓龍雲)으로부터 3·1 운동 계획을 전해 들은 후, 독립 선언서에 서명 날인하고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1920년 8월 9일 경성 지방 법원(京城地方法院)으로부터 서울 남대문역에서 조선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인쇄하고 전국에 배부하여 만세 운동을 폭동시켰다는 혐의로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 있을 때 목사들이 한글로 된 성경책을 갖고 있는 것에 충격을 받고, 1922년 출옥한 후 한국 불교계 최초의 한글판 『(선연한의) 대불정여래 밀인 수증요의 제보살 만행 수능엄경(鮮演漢義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을 출간하였으며, 1928년에는 한글로 『화엄경(華嚴經)』을 펴내는 등, 불교 대중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불교 종단(佛敎宗團) 정화(淨化)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결혼과 육식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건백서를 두 차례 제출했다. 그는 1929년 경상남도 함양에 자급형 농장인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하고 선농불교(禪農佛敎) 운동을 펼쳐 사원 경제의 자립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나온 수익금을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 보내기도 했다.

1938년 중국으로 건너가 장개석(蔣介石), 장학량(張學良), 모택동(毛澤東) 등을 만나 대한 의사군 무장 진격 작전을 피력, 지원을 요청했다. 귀국 후 대한 의사군을 모집하던 중 일제 밀정에 의해 계획이 탄로 나는 바람에 북간도에 마련했던 독립군의 거소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1940년 “사자(獅者) 배속에 충이 생겨 사자가 쓰러지게 되었다”면서 자신이 곧 열반에 들 것을 예고했는데, 그해 2월 24일 75세의 일기로 입적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수심론(修心論)』, 『귀원정종(歸源正宗)』, 『용성선사어록(龍城禪師語錄)』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정부가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追敍)하였으며, 1990년에는 은관 문화 훈장이 추서되었다. 사리탑은 해인사 용탑선원(龍塔禪院) 옆에 있다.

참고문헌
  • 『한국 인명 대사전』
  •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 「이 달의 독립운동가-백용성」(대한민국 국가보훈처, 1998)
  • 공훈 전자 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 국립 중앙 도서관 전자 도서관(http://www.dlibrary.go.kr/WON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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