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黃尙奎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길림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한 광복회 단원, 북로 군정서 재무 담당, 의열단 단원 |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
| 몰년 시기/일시 | 1931 |
| 출생지 | 경남 밀양면 내인동 |
| 거주|이주지 | 경남 밀양 |
| 학교|수학지 | 경남 밀양 |
| 활동지 | 중국 길림 |
| 묘소 | 경남 밀양 |
일제 강점기 길림 지역에서 활동한 경남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황상규는 교육 사업에 뜻을 두고 1908년 밀양에 동화학원(東化學院)을 비롯하여 상동 고명학원(上東高明學院), 마산 창신학교(馬山昌信學校)을 설립하고, 『동국사감(東國史鑑)』이라는 역사 교재를 저술하여 가르쳤다. 이를 통해 그는 청년 학도 200여 명을 배출시켰다. 1913년 황상규는 경상북도 풍기에서 조직된 대한 광복단에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대구 악질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에 주목을 받게 되자, 1918년 만주 길림으로 망명하였다.
황상규는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左鎭) 등과 「무오 독립 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에 서명했다. 그리고 유동열·김규식·김좌진 등과 함께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고 재정 담당을 맡아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였다.
1919년 11월 9일 황상규는 김원봉(金元鳳) 등과 함께 길림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 침략 기관 파괴와 침략자·매국노의 암살 등을 모색했다. 1920년 5월 13일 곽재기(郭在驥)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 대상을 물색하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일제 경찰의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의 혀를 깨물어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결국 일제 경찰은 백지로 기소해야 하였다. 7년 징역형을 언도받은 황상규는 만기 출옥 후에도 조국 광복 투쟁에 매진하여 신간회(新幹會) 중앙 간부와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간부 등을 역임하였다. 1931년 9월 2일 사망하기 직전까지 고향에서 노동 야학원(勞動夜學院)과 여자 야학원(女子夜學院)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통해 민족 의식을 함양하는 일에 헌신했다.
1908년 황상규는 상동 고명 학원(上東高明學院), 마산 창신 학교(馬山昌信學校), 밀양 동화 학원(密陽同和學院) 등을 설립하고 젊은 학도들에게 『동국사감』이라는 역사책을 저술·가르치는 등 민족 정신 함양에 주력하였다.
정부에서는 황상규의 공훈을 기리고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