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範允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간도 관리사 |
| 출생 시기/일시 | 1856년 12월 29일 |
| 활동 시기/일시 | 1902년 |
| 몰년 시기/일시 | 1940년 10월 20일 |
| 출생지 | 경기도 고양 |
| 활동지 | 연해주, 만주 |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만주·연해주 지역의 이주 한인 권익 옹호와 의병 전쟁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881년 청나라는 간도한인 농민을 추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보호하고자 1902년 6월 이범윤을 간도 시찰원으로 파견하였다. 그 뒤 1903년 7월 간도 관리사로 임명된 이범윤은 간도 동포들을 보호하고자 구한국군과 의병을 중심으로 사포대(私砲隊)를 조직했다. 이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모아산(帽兒山)·마안산(馬鞍山) 및 두도구(頭道溝) 등지에 병영을 설치하였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범윤은 500여 명의 사포대를 이끌고 러시아군에 가담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1905년 청나라 측의 강력한 요구에 이범윤은 정부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만주를 떠나 노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노령의 노키에프스크(煙秋)에서 부하들의 생계 문제를 해결하면서 창의회(彰義會)를 조직, 부대를 재정비하였다. 노령에는 이미 많은 지도자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범윤는 동의회(同義會) 부총장에 추대되었다. 이렇듯 노령 내에서 유력한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을 때, 자산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최재형(崔才亨, 일명 在亨)과 결의형제하고 그의 원조로 의병 부대를 편성하였다. 일제의 끈질긴 간섭에도 불구하고 3,000명의 부대원으로 1908년부터 국내진공작전을 폈다. 안중근(安重根)·전덕제(全德濟)·엄인섭(嚴仁燮) 등이 100명 내외의 소부대를 이끌고 작전을 펼쳐, 갑산·혜산진·무산·회령 등 국경 일대의 일제 기관을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총반격으로 큰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그 무렵 이범윤은 대종교에 입교하여 참교(參敎)가 되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직후 유인석(柳麟錫)·김학만(金學滿) 등과 성명회를 조직하여 병합 반대와 무장 투쟁을 호소하였다. 그는 그해 9월에 개척리(開拓里)에서 이상설(李相卨)·홍범도(洪範圖) 등과 함께 의병5군단(義兵五軍團) 조직을 계획하였다. 그런데 그 무렵 러시아 당국 취체가 심해져 한때 붙잡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노령뿐 아니라 간도 백초구(百草溝) 등지의 김창규(金昌奎)·박만흥(朴萬興)·노우선(盧禹善) 등 240여 명의 의병 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1911년 5월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권업회(勸業會) 총재로 추대되었다. 권업회는 당시 노령 최대, 최고의 한인 기관으로 유인석이 수총재(首總裁), 최재형·최봉준(崔鳳俊)이 부총재, 이상설이 의장, 홍범도가 경찰부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12년 6월 이후 이범윤 부대는 이근보(李根甫, 中軍)·최병준(崔秉俊, 部將)·허모(許某, 領將)·서상교(徐尙敎, 李의 書記) 등이 회령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1918년 11월 11일에는 39인과 더불어 무오 독립 선언 발표에 참여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최재형·이동휘(李東輝)·김약연(金躍淵)·황병길(黃丙吉)·김영학(金永學) 등과 함께 완전 독립 쟁취를 논의하였다. 그해 4월부터 의병 부대가 독립군으로 개편될 때, 그는 연길현(延吉縣) 명월구에서 진학신(秦學新)·최우익(崔友翼) 등과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서일(徐一)의 북로군정서와 합동으로 무장 투쟁을 본격화하였다.
1920년 김성극(金星極)·홍두식(洪斗植)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단 단장으로 추대되어 400여 명의 독립군을 통솔하였다. 연해주 신한촌에 본부를 두고 연길·왕청·훈춘 등지에 걸쳐 5개 중대의 병력을 분산 주둔시켰다. 적 기관 파괴·적군 사살·친일파 숙청 등이 목표였다. 일본군의 간도 침략으로 독립군이 일시 노령으로 근거를 옮겼으나 만주에 남아 계속해서 활동하였다. 서일(徐一)이 자유시 참변을 겪은 뒤 1921년 8월 자결한 후 대한 독립군단과 북로 군정서 총재로 추대받았다. 이듬해에는 김좌진(金佐鎭)·김혁(金赫) 등과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한 후 성동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무관 양성에 노력하였다.
1924년 9월 해림(海林)에서 문창범(文昌範)·지청천(池靑天)·이동휘·최명록(崔明祿)·김좌진(金佐鎭)·김규식(金奎植)·현천묵(玄天默)·나중소(羅仲昭) 등과 군사연합회의준비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1925년 신민부가 조직되었을 때, 63세의 노령으로 참여하여 고문이 되었으며 그 뒤로도 각 단의 고문역을 계속하였다. 이후 만주·시베리아에서 활약하다가 1940년 10월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범윤의 공적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