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녕

한자 李東寧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문화·교육/교육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대한 민국 임시 정부 국무령
출생 시기/일시 1869년 2월 17일
활동 시기/일시 1906년
활동 시기/일시 1911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몰년 시기/일시 1940년 3월 13일
출생지 충남 천안
거주|이주지 서울
학교|수학지 서울
활동지 만주·연해주·상해·중경
묘소 효창공원
정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끈 독립운동가.

가계

이동녕은 충남 천원(현 천안시)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영해 군수를 지낸 병옥(炳鋈)이고, 어머니는 광주 안씨였다. 그는 어려서 향리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고, 10세 때 충청남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에 사는 할아버지 이석구(李錫九) 문하에서 수학했다. 본관은 연안, 자는 봉소(鳳所), 호는 석오(石吾)이다. 1885년 17세 때 일가가 상경하여 서울 종로 봉익동(鳳翼洞)에 정착하였다. 1892년 24세에 응제진사(應製進士) 시험에 합격했다.

활동 사항

이동녕은 28세 때인 1896년 독립 협회에 가담하는 등 민권 운동에 나섰다. 만민 공동회(萬民共同會·官民共同會)가 열렸을 때, 나라의 잘못된 정치를 지적하며 상소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이동녕이준(李寯)·이승만(李承晩)과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제국 신문』 사설을 집필하는 등 사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1903년 이동녕은 이상재(李商在)·전덕기(全德基) 등과 손잡고 YMCA 운동을 전개했다. 1905년 을사 늑약(乙巳條約) 체결에 즈음하여 결사대를 조직하여 조약 무효와 파기를 주장하다가 2개월간 투옥되었다.

1906년 이동녕은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하여 이상설과 함께 북간도 최초의 근대학교인 서전 서숙(瑞甸書塾)을 설립했다. 이는 이주 한인 2세의 민족 교육을 시행하는 밑거름이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이동녕은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에 망명하여 이회영 형제인 이석영·이철영·이시영 등과 함께 자치 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운영하는 한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는 학생들에게 독립 정신 고취하여 독립군을 조직하는 초석이었다.

1911년 이상설과 함께 연해주로 활동 무대를 옮긴 뒤 ‘한국 군관 학교’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3개월간 고초를 겪었다. 이후 이동녕이상설·이동휘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대동 신문(大東新聞)』을 발행·보급하였다. 1917년에는 니콜라에프스크에서 대종교 포교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8년 11월 이동녕김교헌(金敎獻)·조소앙(趙素昻)·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길림에서 「무오 독립 선언서」를 선포하였다.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해로 건너간 이동녕은 임시 정부 수립을 모색하였고, 4월 10일 임시 의정원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9월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한 후, 이동녕은 내무총장이 되었고, 1920년 이동휘가 사임하자 대리로 임시 정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2년 임시 정부를 둘러싼 여러 문제가 불거져 국민 대표 회의 소집 등 임시 정부 불신이 표면화하자, 안창호·여운형 등과 시사 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대동 단결을 호소했다. 하지만 상호 간 노선 차이가 크고, 이해 대립이 심각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임시 의정원 의원과 이승만 옹호파들이 전원 탈퇴하는 바람에 1922년 8월 11일 아무런 성과 없이 해체되었다.

1925년 이동녕은 강소성(江蘇省) 전장(鎭江)에서 요양 중 상해로 와서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했구, 군무총장(軍務總長)도 겸임하였다. 또한 그는 권석한 이승만 대통령을 대신하여 직권을 대행하였다. 1928년에는 김구 등과 같이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여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기관지 『한보(韓報)』·『한성(韓聲)』 등도 발행했다. 1929년 10월 세 번째로 의정원 의장(13대)과 두 번째의 임정 주석(1930∼1932)을 맡았다.

1932년 이동녕은 임시 정부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윤봉길 의거를 성공리에 추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그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같이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 수륜사창(秀綸紗廠)으로 피신하였다. 1935년 세 번째로 임시정부의 주석(1935∼1939)이 되었고, 당시 양우조(楊宇朝)·엄항섭(嚴恒燮)·이시영·조성환·차이석·송병조(宋秉祚) 등과 함께 한국 국민당을 조직해 이사에 선임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국민당 대표로 임시정부 외곽 단체인 한국 광복 진선(韓國光復陣線)을 구축하였다. 1939년 그는 임정의 네 번째 주석(1939∼1940)이 되어 김구와 함께 전시 내각을 구성하고 서안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그는 급성 폐렴으로 사천성(四川省) 기강(綦江)에서 숨을 거뒀다.

저술 및 작품

이동녕은 이종일의 권유로 『제국 신문』에 「민족 자강(民族自强)의 방도(方途)」·「위국(爲國)의 방도」 등 수십 편의 논설을 기고했다.

묘소

이동녕은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 정부를 이끌어 조국 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다가 1940년 3월 13일 사천성 기강에서 영면하였다. 임시 정부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1948년 9월 22일 김구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 공원에 안장했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이동녕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국가 보훈처, 『대한 민국 독립 유공자 공훈록』 5(1988)
  • 김석영, 『선구자 이동녕 일대기』(을유 문화사, 1979)
  • 김승학, 『한국 독립사』 하(독립문화사, 1966)
  • 문일민, 『한국 독립운동사』(한국보훈시대사)
  • 이현희, 『임정과 이동녕 연구』(일조각, 1989)
  • 조선 총독부 경무국, 『국외 용의 조선인 명부』
  • 한국 사료 연구소, 『조선 통치 사료』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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