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광

한자 李東光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출생 시기/일시 1904년
수학 시기/일시 1922년
수학 시기/일시 1926년
활동 시기/일시 1928년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활동 시기/일시 1932년 5월
활동 시기/일시 1933년~
활동 시기/일시 1936년
활동 시기/일시 1936년 7월
몰년 시기/일시 1937년
출생지 함경북도 경원군
거주|이주지 훈춘현 대황위
활동지 반석·화전·길림·쌍양
활동지 길림성 반석현, 호란진
활동지 길림성 반석현
활동지 길림성 반석현
활동지 길림성
활동지 길림성 관전현, 환인현, 신빈현, 집안현
정의

일제 강점기 길림 지역에서 활동했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동광은 1922년 동흥 중학교 재학 중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뒤, 반석현에서 활동하던 남만주청년총동맹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9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반석현에서 주로 활동하였는데, 반동구위원회, 중국 공산당 반석현 위원회, 남만임시특별위원회 등의 서기 등을 지내며 노농적위대, 노농 의용군 등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6년에는 항일연군 제1로군 남만성위원회 조직부장으로서 대황구 전투, 삼도외자(三道歲子) 전투 등에 참전하였다.

가계

1904년 함경북도 경원군의 한 중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상준(李相俊)이며, 장세현· 이동일(李東一)이라고도 불렸다.

활동 사항

1918년 가족과 함께 함경북도 경원에서 중국혼춘현 대황구(大荒溝)로 이주하였으며, 1922년 용정의 동흥(東興) 중학교 재학 중 사회과학연구소, 독서회 등 사회주의 사상단체에 참가하여 활동했다. 1925년 간도 지역의 큰 가뭄에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학업을 그만두고 대황구의 삼일 소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26년에는 동흥 중학교에 복학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학생 운동에 참가하였다.

졸업 후 1927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입당하여 동만구역국(東滿區域局)에 배속되었다. 그해 5월 메이데이 기념 시위에 동흥중학, 대성중학(大成中學) 학생들을 이끌고 참여했다. 그해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 검거사건’ 당시 체포되어 용정 감옥에 투옥되었다. 탈옥한 그는 남만(南滿)의 반석현(磐石縣)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고 반석 모범 소학교 교사가 되었다.

1928년 남만청년총동맹의 간부로서 중국 호북성(湖北省)무한(武漢) 군관학교 출신의 진공목과 함께 반석·화전·길림·쌍양 등지에 동향회를 조직하는 한편, 그해 5월에 열린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의에 남만청년총동맹 대표로 참석하여 개별 가입을 통한 민족 유일당 운동을 주장했다. 그해 겨울에는 화전현 팽밀정자산골에서 300여 명의 청소년들이 참가한 단기 강습반을 결성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등의 인물과 파리코뮌· 10월혁명·노동절 등의 사건을 가르쳤다.

1929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30년 6월 반석 동부 구위원회 서기를 맡아서 호란진 등지에서 군중 투쟁을 주도하였다. 1930년 가을 장진국과 함께 한인·중국인 농민들을 동원하여 항일 세력의 정보를 수집하던 친일 단체 이도강 보민회(保民會)를 습격하였다.

1931년 이홍광(李紅光)을 도와 노농적위대를 조직했고, 그해 가을에는 추수 투쟁에 참가하였다. 1932년 2월 9일 반석 동부 구위원회 지구에서 한인·중국인을 지도하여 항일·항조·항채·식량 분배 등의 투쟁을 전개하였고, 그해 4월 호란진(呼蘭鎭) 집창자(集廠子)에서 반일 운동을 지휘했다. 5월에는 이홍광과 함께 반석 노농 의용군을 결성하였다. 그해 10월에는 일제의 반석지구 토벌 작전에 맞서 싸우고, 연길현 옹성랍자(甕聲磖子) 유격 근거지를 건립했다.

1933년 봄, 일본의 토벌에 맞서 양정우·이홍광 등과 함께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해 5월 7일에 반석현 중심현 위원회 제4차 확대 회의에서 서기로 선출되었다. 이후 1년 6개월 동안 괴자항(拐子抗)·파리하투(坡璃河套)·반석·서안(西安)·이통(伊通)에 5개의 구당위원회를 건립하고, 477개 농민자위대 분대를 조직했으며, 길회철도(吉會鐵道) 노동운동을 지원했다. 그해 9월 유격대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獨立師)로 재편하고, 제1단과 소년영을 지휘하여 일본군의 옹성랍자 유격 근거지 토벌에 맞서 싸웠다.

1934년 초 반석·이통·화전(樺甸)·휘남(輝南)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그해 8월 20일 반석현에서 반일회 대표 대회를 소집하고 남만 반일 총회를 구성하였다. 그해 11월 5일 임강현 사도이차에서 중공 남만당 제1차 대표 대회가 열렸으며, 남만임시특별위원회 설립을 결정하였다. 이동광은 반석현 중심현위를 대표하여 공작 보고를 하였다. 그리고 남만임시특별위원회 위원, 서기 겸 선전 부장을 맡았다. 이후 적 점령 지구와 각 근거지를 다니면서 당 조직 활동을 지도하였다. 1935년 9월 15일 남만임시특별위원회가 ‘남만특구 정부 주비회’를 마련하여 남만 인민 혁명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11월 왕청현 석두하자에서 이를 최종 결정하고, 남만주 일대 56개 지방에 이를 설치하였다

1936년 5월 5일에는 재만 한인 조국 광복회 3명의 발기인 중 1명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7월 초 중국공산당 남만 지구 제2차 대표 대회에서 중국공산당 남만성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항일연군 제1군과 제2군이 통합되어 항일연군 제1로군으로 편성되고, 중국 공산당 동만특위와 남만특위는 중국공산당 남만성위원회로 재편되었다. 그 뒤 제1로군 군부는 열하·요령 지구 진출을 결정하였다. 이 때 이동광은 중국공산당 남만성위원회 위원 및 조직 부장이 되었다. 1936년 겨울 항일 연군 제1로군 제2군 군장 왕덕태가 사망하자 이를 위증민이 이어받았다.

1937년 6월, 항일 연군 제1군 당위원회에서는 당위원회 확대 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에서 양정우와 이동광 등 간부들은 그동안 활동을 전체적으로 검토하고 앞으로의 투쟁 방침과 과업을 제기하였다. 「항일 연군 1군 당위 확대 회의 결의안」, 「정치 결의안」, 「항일 사업 결의안」, 「지시 편지」 등 주요 문건을 토론하여 통과시켰다.

얼마 뒤 홍경현[지금의 신빈현] 영릉황토강가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이 전투에서 항일 연군은 승리했지만, 이동광은 전투를 지휘하다가 34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 신주백, 『1930년대 민족 해방 운동론 연구』Ⅱ-만주 항일 무장 투쟁 자료편(새길, 1990)
  • 신주백, 『만주 지역 한인의 민족 운동사』(아세아 문화사, 1999)
  • 허동찬, 「재만 한인 조국 광복회 선언과 강령의 성립 경위」(『한민족 독립운동사 논총』, 수촌 박영석 교수 화갑 기념 논총 간행 위원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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