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呂準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신흥무관학교 교장 |
| 출생 시기/일시 | 1862 |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 출생지 | 경기도 용인 |
| 활동지 | 북간도 용정 |
| 활동지 | 죽산군 원삼면 죽릉리 |
| 활동지 | 길림성 통화현 |
| 활동지 | 통화현 합니하 |
| 활동지 | 유하현 삼원보 |
| 활동지 | 액목현 황지강자 |
| 활동지 | 상해 |
| 학교터 | 용인시 처인구 원산면 죽릉리 |
여준은 1862년 경기도 죽산군 원삼면 죽릉리[현 용인시 처인구 원산면 죽릉리]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시당(時堂), 이명은 조현(祖鉉)·성현(聲鉉) 등이다.
1906년 이상설(李相卨)·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박정서(朴禎瑞) 등과 북간도 용정에 서전 서숙을 설립하여 항일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4월에는 만국 평화 회의에 참가하는 밀사 이준(李儁)을 안내하였다. 이후 국내로 돌아와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 활동하였는데,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 학교 교원으로 초빙되었다. 이후 1908년 고향인 죽산군 원삼면 죽릉리에 삼악 학교(三岳學校)를 세워 신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되자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군 양성에 노력하였다.
1912년에 허혁(許赫)과 통화현에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이주 한인들의 권익 신장에 앞장섰다. 특히 그는 신흥 학교[신흥 무관 학교 전신] 유지·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탁(李鐸) 등과 신흥 학교 유지회도 조직하는 등 독립군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듬해 그는 1913년 신흥학교 교장으로서 교감 윤기섭(尹琦燮), 학감 이광조(李光祖) 등과 교육 내실화에 전념했다. 1918년 봄에는 박찬익(朴贊翊)·정신(鄭信)·유동열(柳東說)·신팔균(申八均)·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左鎭)·서일(徐一) 등 39인이 서명한 「무오 독립 선언서」 발표에 가담하였다.
1919년 3월에는 박찬익 등과 함께 길림에서 군사 독판부를 조직하여 단장으로서 대일 항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후 서로 군정서 부독판으로서 독판 이상룡(李相龍)과 함께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12월 4일에는 임시 정부 간서 총판부(總辦府)를 설치하고 총판에 선임되었다. 1921년 5월에는 이탁(李卓)·김동삼 등과 임시 정부 개조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임시 정부 측에 송부하였다. 1922년 액목현 황지강자에 검성 중학(儉成中學)을 설립하여 교장으로서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30년 1월에는 상해로 가서 김구·이동녕(李東寧)·이탁(李拓) 등과 한국 독립당을 재결성하여 강력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1년 여준은 일제가 만주 침략 당시 일본군과 싸우다가 후퇴하는 중국군에게 모진 매를 맞고, 장백산록(長白山麓)에서 요양하던 중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