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宋夢奎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저항 시인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연희 전문 학교 문우회 대표 |
| 출생 시기/일시 | 1917년 9월 28일 |
| 수학 시기/일시 | 1932년 |
| 수학 시기/일시 | 1935년 |
| 수학 시기/일시 | 1938년 |
| 수학 시기/일시 | 1942년 4월 |
| 몰년 시기/일시 | 1945년 3월 7일 |
| 출생지 | 만주 명동촌 |
| 거주|이주지 | 만주 명동촌 |
| 학교|수학지 | 은진중학교 |
| 학교|수학지 | 연희 전문 학교 |
| 활동지 | 만주·서울·동경 |
| 묘소 | 명동촌 |
일제 강점기 문학 작품을 통해 민족 운동을 전개한 화룡현 명동촌 출신의 저항시인.
송몽규는 민족 문화를 사랑한 진정한 민족 시인이었다. 그는 일본의 민족 말살 정책 특히 한글과 한국 문화를 말살하는 사회 상황 구조를 파악·지적했으며, 기존 독립운동의 한계를 자성하며 학구적·이론적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또한 그는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할 것이라며, 대세를 몰아 독립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전략적 방법론도 제시했다.
송몽규는 함북 경흥 출신으로 1917년 9월 화룡현 지신촌(智新村) 명동촌에서 송창희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25년 4월 윤동주·문익환 등과 명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교장이자 외숙부 김약연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등사판으로 제작한 문예지 『새 명동』을 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서울에서 발행된 아동지 『어린이』,『아이생활』 등을 구독하였고 이를 친구들과 돌려보기도 했다.
1931년 3월 송몽규는 명동 소학교를 졸업한 뒤 윤동주와 함께 길림성 화룡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 화룡현립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20여 리를 걸어 등교하였다. 이곳을 졸업한 뒤 송몽규는 용정의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진학하였고, 1935년 3학년 재학 중 한학을 가르치던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출신의 민족주의자 명의조(明義朝)의 영향을 받아 중퇴하였다.
송몽규는 중국의 수도였던 남경으로 건너간 뒤, 김구(金九)가 중국 중앙 육군 군관 학교에 특설한 한인 특별반(韓人特別班)에 입학하여 군사 훈련 교육을 받는 한편 『신민(新民)』 발행에 관여하였다. 그런데 일제의 강력한 항의해 1935년 10월 한인반은 해체되고 말았다.
송몽규는 1935년 11월 중국제남 지구(濟南地區) 독립운동가 이웅 일파에게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1936년 3월 제남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어 강제 귀국해야만 했다. 송몽규는 1936년 6월 치안 유지법 위반과 살인 등 혐의로 함경북도웅기 경찰서에 구금되어 취조를 받은 뒤 그해 9월경 석방되었다. 이후 송몽규는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용정으로 돌아온 송몽규는 국민고등학교[대성 중학교 후신]에 편입했다. 1938년 4월 윤동주와 함께 연희 전문 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당시는 일제가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에서 한국어 폐지와 일본어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송몽규는 1939년 2월 동급생 윤동주·백인준(白仁俊)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한국 문학 동인 잡지 간행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문학 작품 품평회 등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 활동을 전개하였다.
송몽규는 연희 전문 학교 문과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2년 4월 교토(京都) 제국 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세계사와 문학 연구 등을 통한 민족 문화 유지에 노력하였다. 1942년 10월경부터 1943년 7월까지 도시샤[同志社] 대학윤동주와 제3 고등학교생 고희욱(高熙旭) 등과 더불어 교토 시내에서 모임을 갖고 민족정신을 부흥시킬 수 있는 학문 연구에 힘쓰다가 1943년 7월 10일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송몽규는 1944년 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는데, 1944년 4월 13일 윤동주와 함께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송몽규는 일제의 조선어문 소멸 유도 등의 민족 말살 정책을 비판하였으며, 태평양 전쟁은 일제가 무력으로 종결시키기 어렵기에 조만간 강화조약이 체결될 가능성이 크며 버마[현재 미얀마]와 필리핀 등이 독립국으로 참가할 것이므로 한국 독립의 여론을 환기시켜 세계 각국의 동정을 얻어 독립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송몽규는 1944년 4월 13일 교토 지방 법원에서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3월 7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송몽규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