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羅喆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종교/신종교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대종교 제1대 교조 |
|---|---|
| 성별 | 남 |
| 출생 시기/일시 | 1863년 12월 2일 |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6월 |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1월 15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 몰년 시기/일시 | 1916년 9월 12일 |
| 출생지 | 전남 낙안 |
| 묘소 | 길림성 화룡현 청호촌 |
1909년 단군교를 중광(重光)하여 대종교로 개칭한 제1대 교조.
나철은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일제의 침략이 가시화하자 1904년 호남 출신의 이기(李沂)·오기호(吳基鎬)·최전(崔顓) 등과 유신회를 조직했다. 그는 1905년 6월 이기·오기호·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정계 요인을 만나서는 '동양 평화를 위해 한국·청·일본이 동맹할 것과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선린의 교의로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 귀국한 후,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등 을사 오적을 제거하고자 1906년 1월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동지 규합과 자금 모집에 진력했다. 그는 권총을 구입하고 오기호·김동필(金東弼)·이용채(李容彩)·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 등과 함께 여러 차례 그들을 처단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런데 거사에 가담하였던 서창보(徐彰輔)가 체포되면서 사건 전모가 드러나자, 그는 평리원에 자수하여 10년간의 유형을 선고받아 1905년 7월 12일 동지들과 함께 전라남도 신안군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그는 4개월 뒤 고종의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다.
나철은 평소 단군 성도(檀君聖道)를 숭상하였는데, 항일 투쟁을 위한 민족 갱생의 도(道)는 국조 단군의 교(敎)를 부활시키는 데 있다고 여겼다. 이로부터 민족 종교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마침내 1909년 1월 15일 단군 대황조 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 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선포하였다. 이날을 중광절(重光節)이라고 한다.
나철은 제1대 교조에 추대되어 김교헌(金敎獻)·윤세복(尹世復)·이원식(李元植) 등과 활약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북만주 10여 개소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사업을 펴는 한편 항일 구국 운동에 헌신하다가 1915년 1월 귀국하였다.
나철은 일제의 종교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국외 교포로 교단을 유지하고자 1910년 6월 북간도 화룡현 삼도구에 대종교 지사를 설치하는 한편, 교리의 체계화에도 힘을 기울여 1911년에 『신리대전(神理大全)』을 간행했다.
정부는 나철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