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광단

한자 重光團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 단체
설립자 서일
설립 시기/일시 1911년
해체 시기/일시 1919년 5월
최초 설립지 길림성 왕청현
정의

1911년 3월 길림성 왕청현에 설립한 대종교 계통의 독립운동 단체.

개설

나철(羅喆)은 1909년 1월 15일 서울 제동에서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단군교[이후 대종교]를 창시하고 서울에 남도 지사와 북부 지사(北部支司)를 설치하였다. 1910년 10월 25일에는 백두산 기슭인 북간도 화룡현[일명 삼도구] 청파호에 지사를 설치하고 포교와 반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1911년 3월 길림성 왕청현에 중광단(重光團)을 설립했다. 단장은 함경북도함일 학교(咸一學校)를 졸업하고 대종교에 입교한 서일(徐一)이 맡았다. 중광단(重光團)현천묵(玄天黙)·백순(白純)·박찬익(朴贊翊)·계화(桂和)·김병덕(金秉德)·채오(蔡五)·양현(梁玄)·서상용(徐相庸)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설립 목적

‘중광’은 단군교의 부활을 의미한다. 중광단은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무장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군사 인재와 무기 부족으로 본격적인 군사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이에 대종교 포교와 학교 교육을 통하여 한인들의 민족 의식을 제고시켜 반일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1911년 6∼7월 이정완(李貞完)은 화룡현 학성촌을 거점으로 포교 활동을 추진했고, 나철서일·계화·백순·박찬익 등과 함께 청파호 등지에서 포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변천

서일왕청현, 현천묵과 김병덕은 연변 등지에서 각각 포교 활동에 전념하여 대종교 사회적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과정에서 1914년 5월 13일 대종교가 총본사가 청파호에 옮겨갔고, 북간도 각지에는 시교당(施敎堂)이 설치되어 대종교 신도도 수 천 명으로 급증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중광단(重光團)은 북간도연길현·화룡현·왕청현 등지에 민족 교육을 위한 사립 학교 건립을 추진하였다. 대종교 계통 학교는 동일 학교(東一學校)[화룡현 명신사 이도구]·청일 학교(靑一學校) 혹은 천일 학교(千一學校)[화룡현 삼도구 청파동]·명동학교(明東學校)[왕청현 덕원리]·용지 학교(湧智學校)[연길현 대허문]·동일 학교(東一學校)[연길현 상촌 용천동]·의합 천일 학교(義合千一學校)[화룡현 평강 상리사]·학성 소학교(鶴城小學校)[화룡현 학성]·양성 학교(養成學校)[화룡현 유전동 상촌]·동화 의숙(東華義塾)[화룡현 평강 상리사 토산]·동신 학교(東新學校)·학성 학교(學成學校) 등이 있었다.

국내 3·1 운동 소식을 접한 중광단의 대종교인들은 기독교·천도교인들과 함께 반일 시위 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3월 18일 김현묵(金賢黙)은 기독교인 김하범(金河範) 등과, 그리고 기독교·대종교·천도교 교도와 학생 등 900명이 전개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4일 현천묵은 연길현 이도구에서 약 800명의 군중과 만세 시위 운동에 앞장섰다. 1919년 3월 26일 계화·김석구(金錫九)·구자익(具子益) 등은 길림성 왕청현 백초구에 모인 약 1,200명의 한인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 선언 축하식을 거행하였다.

현황

중광단을 중심으로 대종교 계통의 사립 학교가 발전하자, 일제는 중국 지방 당국에 압력을 가하며 이를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 11월 동남로 관찰사서(東南路觀察使署)에서는 화룡현과 왕청현 지사(知事)에게 대종교가 지방 정부의 비준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제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에 맞서 대종교 측은 중국인과 친밀한 관계가 있던 박찬익(朴贊翊)을 내세워 독군(督軍)이었던 장작상(張作相)을 만나, 대종교의 종교 활동과 민족 교육은 독립운동의 일환임을 설득하여 화를 면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중광단은 1919년 5월 군사 행동을 적극적으로 대종교 중심의 대한 정의단(大韓正義團)을 조직했다. 주요 인물은 서일·계화·양현·채오 등과 공교회 계통의 김성극(金星極)·강희(姜熹)·이규(李圭) 등이었다. 중광단은 본부를 왕청현에 두고 산하에 5개 분단과 70여 개 지단을 설치하였다. 이는 만주 지역 무장 투쟁을 견인하는 밑거름이었다.

참고문헌
  • 강덕상, 『현대사 자료』 26·27(みすず書房, 1967)
  • 국회 도서관, 『한국 민족 운동 사료』(삼일운동편-其二, 1978)
  • 대한민국 임시 정부, 『독립신문』(상해판)
  • 채근식, 『무장 독립운동 비사』(대한민국 공보처, 1949)
  • 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 독립운동사』 2~3(1966)
  • 현규환, 『한국 유이민사』 상(어문각, 1967)
  • 대종교 총본사, 『대종교 중광 육십년사』(동진 문화사, 1971)
  • 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 『독립운동사』 5(1973)
  • 김준엽·김창순,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4(1986)
  • 박환, 『만주 한인 민족 운동사 연구』(일조각, 1991)
  • 박창욱, 『중국 조선족 력사 연구』(연변대학출판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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