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萬寶山 事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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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길림성 장춘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1년 7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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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7월 2일 길림성 장춘현(長春縣) 삼성보(三姓堡)만보산(萬寶山) 지역에서 한·중 두 나라 농민 사이에 일어난 분쟁.
장춘시 교외의 만보산에서 한인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서로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수로 개척 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했다. 이를 ‘만보산 사건’이라 한다. 이 사건은 중국과 일본, 식민지 조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가 조선에서 실시한 토지 조사 사업을 계기로 일본인 대지주가 증가하였지만, 많은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만주나 일본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다. 1931년 4월 만보산 인근 미간지 약 3㏊를 차지(借地)한 이주 한인들이 수로 공사를 진행하자, 중국 농민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에 양국 농민 간에 감정적 대립이 있었으나,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1931년 6월 12일 일제는 경관을 파견해 공사를 강행하였다. 1931년 6월 하순에 제방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데 1931년 6월 12일 일제가 경관을 파견해 공사를 강행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일대 중국 농민 약 500명은 그해 7월 1일 농기구를 가지고 모여 용수로를 막은 제방을 무너뜨렸다. 한인 농민들은 일제의 무력만 믿고 수로 복구와 제방 공사를 계속 진행하여 7월 11일 물길이 통하게 되었다. 이러한 행위는 일제의 음흉한 속셈을 지닌 계획적 행동이었다.
1931년 7월 1일, 2일 한중 농민 간의 충돌에서는 한인 사상자가 없었고 중국인 몇 명이 약간의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일제는 조작 기사를 『경성 일보』에 제보하여 대대적으로 확대·보도하였다. 이에 국내에서는 반(反) 중국적 감정이 유발하였다. 인천·평양·서울 등지에서 수천 명의 한인이 중국인을 습격하였다. 일제 경찰은 일부 한인 불량배를 금품으로 매수해 범죄 행위를 조장했다. 이와 달리 『동아 일보』가 만보산을 대단하지 않은 것이라 보도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결국 일제의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다.
만보산 사건은 한인 농민 대 중국 농민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일본 대 중국의 충돌이었다. 『동아 일보』·『조선 일보』 등은 진상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사건 배후에 중국 주권을 무시하는 일제의 침략 음모와 모략·과장 선전임을 밝혀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취재하던 동아 일보사장덕준(張德俊) 특파원이 행방불명되기도 했다. 국제 연맹의 조사보고서도 만보산 사건이 사실보다 너무 과장되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과장 보도는 국내의 한·중 양국민 사이에 강렬한 반감을 증폭시켜 화교 습격 사건이 일어났고, 중국에서는 배일 운동이 재발하였다.
일제는사건을 조작하여 한국인의 항일 의식을 반(反) 중국인 감정으로 쏠리게 했다. 한·중 양국민의 공동 적인 일제에 대한 연대 의식을 약화시키려는 시도였다. 나아가 한·중 사이의 민족 감정을 자극해 두 민족을 분열시키고는 1931년 9월 만주 사변을 일으키는 데 이용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