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의사 사건

한자 三義士 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 당원이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순국한 사건
관련인물/단체 김만수, 유기동, 최병호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4년 4월 7일
발생|시작 장소 흑룡강성 하얼빈
정의

1924년 하얼빈에서 독립 당원 3명이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순국한 사건.

개설

1924년 3월 경 김만수(金萬秀)·유기동(柳基東)·최병호(崔炳鎬) 등은 하얼빈시 도외구 18도가에 있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신기 여관에 투숙하고 있었다.이들은 하얼빈에서 친일파와 일본 경찰을 암살하며 일제 기관을 파괴하고자 하였다. 이때 독립군과 독립운동가를 전문적으로 체포하는 일본인 경찰부장 국길정보(國吉精保)를 위수로 하는 특별 형사반이 대련에서 하얼빈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거를 계획하였다.

역사적 배경

하얼빈은 안중근이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척살한 지역이기 때문에 일제는 한인 독립군들의 활약을 경계하였다. 이에 반해 독립군들은 활동 영역을 북만 지역으로 확대하고자 하얼빈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런 만큼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의 무장 경찰들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경과

1924년 4월 7일 서로 군정서에 활동했던 유기동·최병호참의부김만수 등은 일본 형사반을 습격하기로 합의하고 거사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일본 경찰에게 정보가 누출되어 오후 11시경 일본 경찰과 중국 경찰 200여 명이 신기 여관을 포위하면서 총격전이 전개되었다.

결과

일본은 한인 통역가를 내세워 투항할 것을 종용했지만, 김만수·유기동·최병호는 이를 거부하고 밤새도록 교전하여 일본인 경찰부장 국길정보(國吉精保)를 비롯한 1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탄환이 모두 떨어져 이들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삼의사 사건은 국내의 『조선 일보』와 하얼빈『빈강 일보』에 게재되어 한인 사회와 국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를 ‘하얼빈 일본 영사관 의거’라고도 한다.

참고문헌
  • 서명훈, 『하얼빈시 조선 민족 백년 사화』,(민족 출판사, 2007)
  • 「國吉警部 補射殺 犯人 등의 身元에 관한 건」(불령단 관계 잡건-조선인의 부-재만주의 부(39), 1924년 4월 22일)
관련항목
이전 TOP